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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

(20) 인본주의와 인류애의 표상이 된 흥남철수와 ‘메러디스 빅토리’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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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1.15 17:18 ㅣ 수정 : 2020.01.15 17:18

▲ 좌측 흥남항에서 피란민 1만4,005명을 승선시켜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록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갑판을 가득 메운 북한주민들과 당시의 ‘레너드 라루’선장 모습, 우측 1954년 카톨릭 수도자가 되어 바오로 수도원에서 평생을 헌신한 ‘마리너스 라루’수사 [자료제공=생명의 항해]

군인 10만과 피란민 10만을 구한 성공적인 ‘흥남철수작전’은 X-mas 선물

 

라루 선장의 상선 ‘메러디스빅토리’호 1만4005명을 태워 기네스북에 등재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부두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400여톤의 다이너마이트와 227톤의 폭탄, 200드럼의 휘발유를 미해군 수중폭파팀과 공병이 폭파 폐기시키고, 마운트 맥켄리호에 승선해 지휘를 하던 10군단장 알몬드 및 90상륙지원단장 도일 소장도 24일 16시32분에 흥남항을 출발함으로써 유엔군 10만여명과 35만톤 군수물자를 철수시킨 ‘흥남철수작전’은 성공리에 완료되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흥남항에 남아있던 군인들과 9만 8천여명의 피란민을 실어 부산 및 거제도 장승포로 철수시켰던 197척의 선박 중 하나는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였다. 이 선박은 선적했던 무기를 모두 내리고 피란민 1만4천여명을 승선시켰다. 이 사실을 ‘생명의 항해’ 저자인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의 노력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2004년 9월에 등재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37살된 ‘레너드 라루’선장이 지휘하는 비무장 상선으로 미해군 용선계약에 따라 미국 해운 회사 ‘무어 맥코맥 선사’소속으로 90상륙지원단에 배속되어 인천상륙작전도 참전했다.

 

1950년 8월16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항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4일간 태평양을 항해한 뒤 요코하마 항에서 미 7사단 32연대 소속 병력(절반 정도가 새로이 모병된 한국인 카투사로 구성)들과 탱크와 탄약을 실었다. 이 선박은 인천상륙작전중인 9월 17일 22척의 호위선 중에서 인천에 가장 먼저 들어간 상선이다. 이는 선원들이 대부분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바 있는 역전의 해군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인천상륙작전 지원임무를 마치고 일본으로 복귀하는 도중에 백기를 달고 있는 나룻배 한 척을 나포했다. 그 배에는 강제 징집된 것으로 보이는 14명의 북한군인이 타고 있었고 자신들을 감시하던 중공군들을 구금한 후 공해상으로 도망치는 길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들은 인천상륙작전 개시 이래 최초의 포로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한명이 머리와 팔이 칼에 베인 상처가 있어 러니 사무장은 응급치료제로 정성껏 치료해주었고, 그들을 요코하마 항에서 미 해군에 인계하였다.

 

그후 일본과 한국의 항구 사이를 수차례에 걸쳐 왕복 운항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장진호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유엔군 사령부로부터 50갤런 드럼통에 담긴 항공유 1만톤을 흥남 연포비행장에 주둔해 있는 미 해병 1항공대의 전투비행단에 수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배는 12월 11일 흥남항에 도착했는데 중공군의 총공세로 17일 연포비행장을 폐쇄할 예정이어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해 하역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부산에서 항공유를 내리던 중인 12월 19일, 아직 하역하지 못한 항공유 300톤이 배에 남아 있었지만 철수작전을 돕도록 즉시 흥남항으로 되돌아 오라는 긴급 호출을 받았다. 이 날 다시 출발하여 20일 19시경에 기뢰가 부설된 해역을 뚫고 흥남 외항에 도착하였다.

 

그 때는 이미 미 해병 1사단과 한국군 1군단 병사들은 철수하였고 미 7사단 병력들도 흥남부두에 집결하여 승선을 완료한 채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통제선-3’까지 축소된 방어선을 전담하는 미 3사단만이 남아서 철수를 엄호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22일 새벽, 기계화부대 상륙정이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대기하고 있는 외항 46번 계류장에 다가와서 1,000명의 군인에게 공급할 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을 가지고 가자 라루 선장과 선원들은 전투부대원들을 태워서 곧 출항할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던 중 명령에 의해 오히려 위험한 내항 3번 선착장으로 입항했다. 폐허가 된 흥남 시가의 눈 덮힌 언덕배기로 포탄들이 비오듯 쏟아지고 북한주민들은 마지막 남은 퇴로인 바닷가로 허둥대며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전투에 지치고 면도도 못한 덥수룩한 차림의 미 10군단 부참모장 맥카프리 중령 등 5명이 승선하였다.

 

그들은 라루 선장에게 “대부분의 선박과 유엔군은 이미 흥남을 떠났고 공산군이 포위망을 빠르게 좁혀오고 있습니다. 이 배가 마지막까지 흥남에 남아있는 배들 중 하나입니다”라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 배는 단순한 화물선으로 다른 승객을 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선장님께 피란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 없으며, 선장님이 예정대로 얼마간의 군인들만 태우고 빨리 흥남항을 빠져나가시겠다면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라며 “하지만 선장님이 자원하여 피란민 중 다만 얼마만이라도 태우고 나갈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마지막 철수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선장님 도와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라루 선장, "우리가 저들을 구출하겠습니다"

 

미쳤어! 48명의 선원이 피란민 1만 4000명 구출

 라루 선장은 전혀 망설이지도 않았고 누구와 상의하지도 않은 채 너무 쉽고도 간단하게 “알겠습니다. 우리가 저들을 구출하겠습니다”하고는 “몇 명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많이 데리고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라루 선장의 명령이 하달되자 선원들은 피란민들이 탈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다리 등을 급하게 만들어 설치했다.

 

22일 21시30분부터 피란민들의 승선이 시작됐다. 이들 북한 주민들의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4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등에서는 끊임없이 함포 사격을 가했고 발사한 포탄들은 포성을 울리며 배 위를 지나갔다. 또한 포탄의 진동으로 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일반 화물 운반용으로 제조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선원이 머무르는 12인용 선실밖에 없었고 선원들은 48명이었다. 배 한쪽에 3층으로된 화물선창이 있는데 아래쪽 선창에 피란민을 수용한 다음, 숨 쉴 공간만 남겨놓고 선창을 칸막이로 막고 그 위에 또 태웠다. 또 제일 아래쪽 선창 꼭대기와 갑판 사이에 선창을 임시로 만들어 그 곳에도 사람들을 짐 부리듯 싣고 승강구의 뒤끝은 출입과 환기를 위해 그대로 놔두었다.

 

갑판 아래의 공간이란 공간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뒤늦게 들어온 사람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처럼 내내 서있어야 했다. 선창을 채우자 갑판 사이도 채우고 주 갑판과 보트 계류장까지도 모자라 삭구(배에서 쓰는 밧줄 종류)에 매달리기까지 했다.

 

새벽녁이 밝아오자 피란민 승선을 감독하던 2등 항해사 알버트가 탄식을 하며 외쳤다. “미쳤어, 마치 손바닥만한 한 차에 12명의 거인이 들어가는 서커스 어릿광대 놀이 같아…”

 

이때 라루 선장이 총 몇 명이나 배에 탔나고 물었다. “아래쪽 선창에 1만명을 태우곤 세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라면서 1등 항해사 사바스티오는 싱긋 웃었다. 평시에는 1,200명 정도까지는 승선이 가능했는데,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1만4000명을 쑤셔놓듯 태웠다.

 

하지만 사무장 로버트 러니 상급선원은 “이 배는 이들에게 제공할 먹을 거리는 물론 물이나 화장실도 없고, 의사나 통역할 사람도 없으며, 기온은 영하인데 화물창에는 난방도 안되고 전기시설도 없고, 더군다나 갑판에 있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사람들은 바닷바람과 얼음같이 찬 물보라 속에서 어떻게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까?”하며 걱정을 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북한 피란민을 싣고 바다로 나가기 직전에 한 대의 짚차가 선착장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한 명의 미 육군 중위가 뛰어내리며 황급히 라루 선장에게 “범죄 수사대에서 방금 공산주의자 몇 명이 피란민으로 위장하고 탔다는 정보를 입수해 한국군 헌병 17명과 함께 승선해서 같이 가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급하게 말했다.

 

실제로는 몇 명이 아니라 많은 숫자의 간첩들이 탔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남한으로 내려가 설사 유엔군 작전을 방해하더라도 더 많은 선량한 피란민을 구출하려면 누가 간첩인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대로 모두 태우고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상황에서 피란민들을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엔군의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생명의 항해’를 계속 진행하는 것 뿐이었다.

 

피란민 승선이 완료되자 138미터의 갑판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찼으며 배 2번 창고 아래에 있는 폭발성이 강한 300톤의 항공유와 1만 4000명의 피란민을 실은 채, 드디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3일 오후 2시54분에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화물 대신 사람들을 태우고 눈보라 치고 삭풍이 불어대는 동해바다에서 28시간 820km의 ‘생명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다음날 새벽이 되었을 때,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온통 얼어붙은 송장이 되어 갑판을 뒤덮을까 걱정했는데 피란민들은 모질게도 질긴 생명줄을 붙들고 있었다. 오히려 항해 도중 5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승무원들은 ‘김치1’에서 ‘김치5’까지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또 먹을 것을 찾아 젊은이 몇 명이 선원실로 험악한 기세로 뛰어들기도 했고, 유언비어가 난무하여 폭동의 조짐도 있었으며 그 와중에 헌병으로 위장한 중공군을 체포해 강금하기도 했다.

 

드디어 24일 13시21분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선장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 올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부산은 이미 유엔군과 백만명 이상의 피란민들로 북적이고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으니 남서쪽 80km 더 가서 거제도에서 하선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라루 선장은 체력적 한계에 도달한 피란민들을 위해 10번 계류장에 정착하고 유엔군의도움을 받아 부상자들은 부산항에 내려 치료를 받고 음식과 물, 담요 등을 배에 실어 나누어 주었다. 24일 자정에 시작된 피란민들의 식사는 다음날인 25일 아침 7시가 다되어야 겨우 끝났다. 1950년 한반도의 크리스마스는 정말로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날이었고, 선상에서 라루 선장은 인생에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 좌측, 1950년 12월 26일 아침 거제도에서 안도감에 화색이 돌며 하선하는 북한 피란민들과 우측, 2001년 여름 미국 뉴튼에 있는 바오로 수도원에서 투병중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던 ‘마리너스 라루’수사와 수도원 인수를 위해 방문한 왜관 수도원의 김구인 원장신부 [자료제공=생명의 항해]

한국 사람들에 의한 뉴튼 수도원의 부흥은 ‘마리너스’수사와 선원들의 선행에 대한 보은

그날 12시42분에 마침내 거제도에 도착했지만 항구가 작아 공해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26일 아침에 지원받은 미군 8,500톤급 상륙정 2척에 7,000명씩 태워 하선시켰다.

 

떠나는 피란민들은 즐겁게 손을 흔들며 깊은 감사의 눈길을 보냈고, ‘메러디스 빅토리’호 48명의 선원들은 원래 군인들만 태워 왔으면 이렇게 위험하지 않았겠지만 목숨을 담보로 수행한 무모한 생명구출 항해에서 끝없는 보람과 만족 및 자부심을 느꼈다.

 

그렇지만 라루 선장은 자신의 무모한 결정의 결과에 기뻐할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피란민들을 떠나 보내고 텅빈 선창을 돌아보다가 러시아제 기관총이며 자동 권총과 탄약통, 수류탄 더미들이 반짝거리며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또다른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친절한 피란민들이 감사의 표시로 남겨 놓았거나 마음이 변한 적군들이 전향의 징표로 남겨 놓은 선물이었다.

 

그후 라루 선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 20년을 보냈던 바다 생활을 접고 1954년 수도자의길로 들어섰는데, 베네딕트 회 바오로 수도원에서 ‘마리너스’라는 수사로 근 50년 헌신했다. 그는 “흥남에서 14,000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사건이 저의 결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수도 생활에 헌신하려는 사람 수가 감소하자 뉴저지 뉴튼의 약 70만평 광활한 대지에 자리잡은 바오로 수도원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베네딕트 수도회 슈뢰더 대수도원장이 140명의 수도자가 있는 왜관 수도원의 원장인 김구인 신부에게 도와줄 수 있는지 질의를 하였다. 왜관 수도원이 ‘마리너스’수사가 헌신했던 바오로 수도원을 회생시키기로 결정한지 이틀 후인 2001년 10월 14일 투병중이던 ‘마리너스’ 수사는 87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마리너스’수사가 선종한지 2개월 후, 한국인 수도자들이 도착하여 수도원 복구작업에 돌입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인 카톨릭 신자들은 뉴튼에 찾아와 일을 도왔다.

 

2004년 1월, 뉴욕 타임즈 특집기사에서 골드블렛 기자는 “한국 사람들에 의한 수도원의 부흥은 50년전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던 ‘마리너스’수사와 선원들의 선행에 대한 보은으로 보인다”라고 소개했다.

 

‘마리너스’수사가 된 라루 선장은 1950년 겨울 흥남항과 거제도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성경의 한 귀절을 분명히 깨닫고 결심하여 실천했다. 그것은 인본주의와 인류애의 표상이 되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Whatsoever you do to the least of these, you do unto Me)!”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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