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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

(29) 수많은 생명 앗아간 '고지전'의 서막 ‘피의 능선 전투’,지금도 유해 발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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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3.06 19:56 ㅣ 수정 : 2020.03.18 10:10

지리한 휴전회담 속의 고지전 서막에서 2만명의 희생자 낳아

▲ 2011년 7월에 개봉된 신하균(강은표 역), 고수(김수혁 역), 이제훈(신일영 역)이 주연한 영화 ‘고지전’ 포스터와 양구군 동면 월운리에 세워진 ‘피의 능선 전투’ 전적비 [자료제공=국방부]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1951년 7월10일 휴전회담이 진척을 보이지 않자 유엔군 사령부는 군사력에 의한 압력으로 협상을 강요할 필요성을 느껴 지상에서 적에게 적극적인 압력을 가하고 유리한 방어선을 확보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7월21일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에게 동부전선의 아군 취약 지역인 펀치볼을 우선적으로 공격했다. 펀치볼은 강원도 양구 북방에 위치한 해발 450 m 내외의 분지로써, 주변의 지형은 도솔산, 대우산, 가칠봉등 1,200m 내외의 고지군으로 둘러쌓여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긴 지형이다. 펀치볼 능선에서의 공방전은 9월 중순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지금 휴전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유엔군은1951년 8월 중순 장마가 그치면서 그동안 중단했던 공격을 재개했다. 이때 벤플리트 사령관은 미 2사단장에게 이른바 펀치볼이라고 불리는 해안 분지에의 공격과 병행하여 대우산 서측의 983고지(피의 능선)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피의 능선(Bloody Ridge)’은 양구 북방 방산면 고방산리와 동면 월운리 일대의 983고지·940고지·773고지를 잇는 능선을 가리키며, 미국 ‘성조지(stars and stripes)’의 종군기자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능선이 피로 물들게 된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투에서 벤플리트 사령관은 한국군의 전투 기량과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국군 5사단 36연대를 미 2사단에 배속시켰다. 국군 5사단 36연대(연대장 황엽 대령)는 미 2사단과 함께 양구 북방 해안분지 서쪽에 있는 983고지의 공격을 맡게 되었다. 

피의 능선 983고지 일대는 양구읍과 해안분지인 펀치볼을 내려다보며 아군 동향을 관측하고 포격을 가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북한군은 이곳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해 놓았을 뿐 아니라, 북한군 12사단과 27사단 병력을 집중시켜 배치하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 2700명 희생으로 북한군 1만5000명 사살하며 ‘피의 능선’ 완전장악 성공

국군 36연대는 8월 18일 새벽부터 미군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북한군 제12사단이 지키는 983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날 밤까지 공격은 계속되었으나 북한군이 진지 전방에 대규모로 매설해 놓은 지뢰 때문에 적의 방어선 돌파에 실패했다. 

그러자 국군 제36연대는 피의능선 983고지 전방에 소수 병력으로 고착시키며 북한군 27사단이 지키는 동쪽의 940고지와 773고지로 우회하여 공격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8월 19일부터 773고지와 940고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해서 8월 20일 773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940고지와 983고지를 공격해서 8월 22일에는 983고지마저 점령했다.

그날 밤 북한군 12사단이 반격을 가해오자 미 2사단 사령부는 9연대와 38연대를 보내 국군 36연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북한군 12사단과 27사단이 전력을 보강해 총공세를 가해오면서 8월 27일 피의 능선 고지들은 모두 다시 북한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국군 5사단과 미 2사단 사령부는 열흘간 전투에 지친 36연대와 국군 35연대를 교대하여 고지 탈환 임무에 나섰다. 국군 35연대는 8월 28일 773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그날 밤 북한군의 역습을 받고 고지에서 또 퇴각했다. 

그러나 국군 35연대는 8월29일 오전 반격에 나서 773고지를 다시 탈환한 뒤 미 9연대 3대대와 임무를 교대했다. 미 9연대는 940고지 공격에 나섰으나 북한군의 반격을 받아 773고지마저 다시 빼앗기고 물러났다.

이처럼 피의 능선 고지들을 둘러싸고 격전이 계속되자 북한군은 6사단을 추가로 이 지역으로 보내 병력을 증강시켰다. 그러자 국군과 유엔군도 이 지역으로 국군 7사단 8연대 등의 병력을 추가로 투입시켰다.

9월에 들어서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 9월3일 미 9연대가 다시 773고지를 점령했다. 당시 미 1해병사단과 국군 1해병연대는 해안분지 북쪽의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서 924고지와 1026고지 등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해안분지 서쪽의 피의 능선을 방어하던 북한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고립될 것을 우려해 940고지와 983고지를 포기하고 이른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고 불리는 방산면 문등리와 동면 사태리 일대의 894고지·931고지·851고지로 퇴각했다. 

북한군이 퇴각하자 미 9연대와 23연대는 9월5일까지 940고지와 983고지를 확보해 ‘피의 능선’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1만5천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국군과 유엔군에도 2천7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사진은 국군 5사단 36연대(연대장 황엽 대령)가 미 2사단과 함께 공격한 양구 북방 해안분지 서쪽에 있는 ‘피의 능선’ 983고지로 밴플리트 사령관이 전쟁 중 가장 많은 포탄을 쏘아 민둥산이 되었고 능선 전체가 피로 물들었다 [사진제공=국방부]

 

하루 3만 발 포격,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일명 무제한 사격)’ 적용

특히 미군은 ‘피의 능선 전투’에서 4개 포병대대를 동원해 105mm와 155mm 대포 등으로 북한군 진지에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일명 무제한 사격)’이라고 불리는 하루 평균 3만 발씩 무자비한 포격을 가했다. 훗날  밴 플리트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전쟁 중에 가장 많은 포탄이 소모됐다고 말했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펀치볼 해안분지 북쪽의 능선으로 몰아내고 양구읍과 해안분지를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하였으며 이어 ‘피의 능선’ 북방의 ‘단장의 능선’탈취를 위한 공격을 계속하게 된다. 

 ‘피의 능선 전투’로 피아 2만명의 수많은 희생자가 묻혀 있는 이 지역에서는 6.25남침전쟁이 끝나고 47년 후인 2000년부터 시작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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