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의 JOB채](44)파이썬의 교훈을 실행한 LG생활건강 차석용 대표, 주가는 오르겠지만

이태희 편집인 입력 : 2020.03.10 16:34 ㅣ 수정 : 2020.03.12 07:21

안동지청 반병현씨, 6개월치 단순작업을 파이썬으로 크롤러 만들어 반나절에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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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생활건강 차석용 대표이사 부회장.[사진 제공=LG생활건강]
 
 

[뉴스투데이=이태희 편집인] 지난 2018년 9월 대구지방고용노동청 안동지청의 사회복무요원 반병현(27)씨는 상사로부터 방대한 분량의 단순 작업을 지시받았다. 안동지청에서 최근 1년간 보낸 모든 등기우편 기록을 조회해 정리한 자료를 인쇄해 보관하라는 내용이었다. 
 
다소 무지막지해 보이는 이 지시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노동청에는 임금체불, 실업급여 수령, 부정수급 등과 같은 다양한 노무관련 민원분쟁이 발생한다. 노동청이 해당 사항을 처리하면 등기우편으로 그 결과를 발송한다. 문제는 민원인이 “나는 그런 우편을 받은 적이 없다”고 잡아떼면 소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온라인 조회 서비스를 이용하면 간편하지만, 우체국은 최근 1년 동안만 등기우편 발송기록 조회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 결과 1년 2개월이 지난 사안은 등기우편 발송 여부를 온라인상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된다.
 
반씨의 상사는 최근 1년치 기록을 인쇄해두면, 다음해에 관련 분쟁이 발생해도 손쉽게 등기우편 발송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노동청이 우체국에 등기우편 발송기록 조회 서비스 제공기간을 5년이나 10년으로 대폭 확장하는 게 최선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료주의’의 두터운 벽을 감안하면 사회복무요원에게 단순작업을 시켜서 분쟁에 대비하겠다는 반씨 상사의 발상은 나름대로 ‘행정개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반 씨가 만약에 직접 1년치 등기우편 발송기록을 정리하려면 우체국 홈페이지에 접속해 등기번호 13자리를 입력해서 그 결과물을 모두 정리한 다음에 인쇄해야 한다. 이처럼 하루 8시간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이 ‘단순 반복 노동’을 통해 처리하면 6개월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반 씨는 시급 1600원을 받고 있었지만 ‘혁신가’였다. KAIST에서 바이오 및 뇌공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파이썬(Python)으로 크롤러(crawler)를 만들어서 단순노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파이썬(Python)은 비전공자들이 쉽게 이해해서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간결한 로직과 높은 효율성 등을 인정받아 머신러닝, 그래픽 등의 분야에서 선호되고 있는 추세이다. 크롤러(crawler)는 웹상의 다양한 정보를 자동으로 검색해서 색인 작업을 하기 위해 검색 엔진 사이트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이다.
 
반 씨는 우체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안동지청의 최근 1년 간 발송한 등기우편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문서를 검색해서 정리하는 크롤러만들어냈다. 파이썬으로 등기우편기록을 검색하는 크롤러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술적 장벽에 직면할 때마다 ‘구글신’에게 물어봐서 해결했다.
 
반씨는 오전에 이 크롤러에게 작업을 시키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왔다. 그 동안 크롤러는 반 씨를 대신해서 단순 반복 노동을 완벽하게 끝내놓았다.
 
 
파이썬이 만든 크롤러는 ‘무서운 사건’, 단순 노동의 종말 선언

반 씨의 사례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단순 반복 노동으로 자신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인간은 이제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단순 노동 작업자가 6개월 간 걸릴 작업 분량을 반 씨와 같은 혁신가가 반 나절만에 뚝딱 처리해버린다. 

 
창의력과 기획력, 통찰력과 분석력을 발휘해야 사람 대접을 받게 된다. 반 씨는 파이썬으로 구글신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크롤러를 만든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유명인사가 됐다.
 
이는 ‘무서운 사건’이다. 파이썬, 구글신, 크롤러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 노동종사자일 확률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이썬을 활용하지는 못해도 파이썬으로 어떤 크롤러를 만들라는 지시 정도는 내릴 수 있어야 하는 세상이다. 우리 시대에 ‘단순 반복 정신노동’은 진정으로 설자리가 없다는 게 ‘파이썬의 교훈’인 셈이다.
 
 
LG생건의 ‘알 파트장’은 반병현이 만든 ‘크롤러’와 정확하게 일치
 
LG생활건강(대표이사 부회장 차석용)이 지난 달 26일 단순·반복 업무를 수행하는 로봇업무자동화(Robotic Process Automation) 시스템 '알 파트장'을 도입했다고 밝힌 것도 사무직 종사자들에게는 위기경보이다. ‘로봇 파트장' 8대를 도입해 엑셀 업무, 전산시스템 조회 및 다운로드는 물론 이메일 송·수신도 가능해 결과 자료를 담당 임직원에게 전송하는 업무를 수행하도록 한다는 이야기이다.
 
LG생활건강의 알 파트장은 증권사와 같은 금융기관들이 4년여 전부터 도입해 온 AI 로보 어드바이저와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로보어드바이저는 롱테일(소액투자자) 금융상품 시장을 확대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측면이 크다. 자산가들의 재산을 관리해주는 인간 PB들의 역할은 로보 어드바이저로 인해 크게 위축되는 상황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융시장의 특성상 인간과 AI의 공존은 상당 기간 유지될 전망이다.
 
하지만 화장품 회사인 LG생활건강의 알 파트장은 단순 반복 노동이라는 인간의 영역을 직접 대체하고 있다. 8대의 알 파트장은 인간 직원 237명이 연간 총 3만 9000시간을 일해야 하는 업무를 수행한다고 한다. 3만 9000시간은 13.4년에 해당되는 기간이다.
 
알 파트장은 바로 안동 지청의 반씨가 만든 크롤러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존재이다. 알 파트장은 LG생활건강 직원 237명분의 일감을, 반씨가 만든 크롤러는 반씨가 6개월 동안 할 일을 수행한다. 반씨가 단순 노동을 하지 않는 대신에 크롤러를 만들겠다는 기획력과 크롤러를 만들어내는 전문성을 발휘했듯이, 알 파트장이 빼앗아간 일을 해오던 LG생활건강 직원들도 다른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LG생건의 알 파트장, 연간 149억여원의 당기순이익 증가요인

한국의 직장인들에겐 ’반병현 되라'는 메시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등재된 LG생활건강의 2018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사 직원 4512명의 평균 연봉은 6300만원이다. 그동안 알 파트장의 업무를 담당해왔던 단순 반복 노동을 인간 영역에서 삭제시키면, 273명의 단순 작업 노동자 감축 요인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237명의 인력을 줄이면 연간 149억 3100만원의 인건비가 절감된다. 이는 고스란히 회사의 당기순이익 증가분으로 이전된다. 주주 가치를 제고시키는 주가 상승 요인이다.
 
차석용 대표는 실적 기반의 대표적 장수 CEO로 꼽힌다. 지난 2004년 12월 취임한 차석용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 2011년 12월에 부회장으로 승진해 실적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왔다.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의 지난 해 8월 발표에 따르면 LG생활건강의 시총은 2005년 1월 기준 4357억 원에서 지난 해 7월 말 기준 19조6321억 원으로 뛰어 올랐다. 무려 44배의 증가율이다. 알 파트장 도입은 ’효율성의 신‘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차 대표의 경영스타일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행보이다.
 
그러나 LG생활건강 임직원 중에서 단순 반복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온 사람들은 위치가 불안해 질 수 있다. LG생활건강만의 문제도 아니다. 알 파트장의 도입은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단순 반복 노동을 그만두고 반병현과 같은 직원이 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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