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편집인 입력 : 2020.06.04 07:41 ㅣ 수정 : 2020.11.21 16:01
대기업 노조에 대한 한국사회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켜야
[뉴스투데이=이태희 편집인]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노조 시대’를 열어가고 있지만 이는 양날의 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국민 지지를 받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한국사회에서 고소득 직장인 대기업 노조에 대한 여론은 그리 우호적인 편이 아니다. 처신을 조심하지 않으면 ‘귀족노조’라는 낙인이 찍히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더욱이 삼성그룹이 수십년 된 ‘무노조경영원칙’을 폐지하기로 결정하게 된 과정도 자생적이 아니다. 삼성 직원들이 주도한 게 아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직원들의 백혈병 위험이나 김용희씨와 같은 해고노동자 문제 등이 이슈로 불거졌으나, 삼성그룹 노사관계의 핵심은 아니었다. 시민단체와 정치권은 떠들썩했으나, 대다수 직원들은 큰 관심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회사 측이 제공하는 임금 및 복지조건에 만족해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삼성노조 시대는 오너 최고경영자(CEO)인 이 부회장이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 부회장이 피고인 국정농단 사건의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새로운 노사관계 정립을 주문했고, 이 부회장이 화답한 결과이다. 삼성직원들은 투쟁의 산물이 아닌 외압에 의해서 노조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산업화시대 이후 초유의 현상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노조 시대는 빠르게 다가오는 조짐이다. 지난 6일 이 부회장의 대국민사과 때만해도 ‘자녀 경영권 승계 포기’ 발언에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 부회장 경영행보의 발목을 잡고 있는 국정농단 재판,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수사 등이 모두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자녀 연령을 감안하면 경영권 승계 포기는 20~30년 뒤의 문제이다.
이 부회장의 사과 내용 중 가장 인화력이 강한 주제는 ‘노동 3권 보장’이었다. 수십년간 지속돼온 삼성의 무노조경영방침을 포기하고 노조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파업)을 모두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노동3권 보장은 당장 실현돼야 할 현안이다.
이 부회장은 후속조치도 실행했다. 삼성그룹의 20여개 주요 계열사 사장단은 지난 1일 경기도 용인 삼성인재개발원에서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초청해 ‘건전한 노사관계’에 대해 강연을 들었다.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전영묵 삼성생명 사장, 이영호 삼성물산 사장 등 전자와 금융계열 CEO들이 모두 참석했다.
삼성 사장단 모임이 3년 4개월만에 부활된 것이다. 삼성 사장단 회의는 삼성전자 서초동 사옥에서 매주 수요일에 정례적으로 열렸었다. 그러나 2017년 2월 이후 중단됐다. 이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 재판을 받게 된 이후이다. 부활된 첫 모임에서 문성현 위원장을 연사로 부른 것은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앞으로 삼성그룹이 문재인 정부의 노사정책 가이드라인을 준수하겠다는 선포식처럼 보인다. 문 위원장은 2017년 8월부터 문 대통령 직속 경사노위 위원장을 맡아왔다. 민주노총 산하 금속연맹 위원장(1999년)을 지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삼성노조 시대의 개막은 글로벌 기업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는 논리이다. 요즘 글로벌 기업에는 노조가 없다. 지구촌 경제를 주름잡는 ICT 공룡인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등 그 어느 곳에도 노조는 없다. 뛰어난 엘리트들인 이들 기업 근로자들은 ‘집단 이익’보다는 ‘개인 이익’ 증대에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코로나19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속에서 ‘K방역’이 글로벌 모범사례로 떠올랐듯이, 노조를 파트너로 삼는 뉴삼성 모델이 글로벌 ICT 기업 간에 이상적인 경영방식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풍이 더 거셀 수도 있다. 1970년대 산업현장이나 1990년대 언론계 등에서의 노조운동은 ‘정의의 상징’이었다. 열악한 근무조건에 처한 근로자들의 생존권을 지킨다거나, 정치적 민주화를 추동한다는 점 등에서 사회 전반의 지지를 견인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액연봉을 자랑하는 대기업의 노조활동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따가운 편이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단적인 사례이다. 평균 연봉 9000만원대인 현대차 생산직 근로자들은 큰 폭의 임금인상, 고용승계 등을 요구함으로써 집단 이익을 관철시켜나갔다. 그 과정에서 파업도 불사했다. 하지만 그만큼 한국 노동운동의 기반은 침식돼갔다. ‘귀족노조’에 대한 염증이 그것이다. 특히 흙수저 청년층은 현대차 노조가 싫어서 현대차 불매운동을 펴야 한다는 논리까지 폈다.
삼성노조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현대차 노조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삼성근로자는 대한민국의 ‘계층 사다리’에서 최상층부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난 해 사업보고서 기준으로 보면, 상당수 계열사가 억대 연봉급이다. 삼성전자 1억 800만원, 삼성물산 1억 100만원, 삼성생명 9400만원, 삼성증권 9342만원, 삼성화재 8817만원 등이다. 건강검진, 휴가, 자녀 대학등록금 등에 대한 복지지원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초양극화시대에 이런 호사를 누리는 대기업 노조운동이 살 길은 오히려 하청업체 노동자와의 공생이다. 동일한 글로벌 가치사슬에 속하지만 경제적 신분이 현격하게 낮은 중소기업 동료 노동자에 대한 배려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집단이기주의에 빠진다면 도덕적 정당성 상실을 피할 수 없다.
양대노총 간의 파워게임이 격화된다면, 그것도 부정적인 변수이다. 삼성그룹 전체 계열사 61 곳중 20%에 해당되는 12곳에 이미 노조가 설립돼 있다. 삼성생명, 삼성 SDI, 삼성엔지니어링, 삼성에스원 등은 민주노총 소속 노조이다. 삼성화재,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 삼성디스플레이 등은 한국노총 쪽이다.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증권,삼성웰스토리에는 2개 이상의 복수노조가 설립돼 있다.
누가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노조가 될지가 최대 관전포인트이다. 삼성전자에는 1980년에 구성돼 활동해온 노사협의회와는 별도로 4개의 노조가 존재한다. 1,2,3노조는 조합원이 2명, 3명, 30여명에 불과하다. 지난 해 11월 16일 출범한 제 4노조가 조합원 500여명 규모로 최대이다. 더욱이 한국노총 산하이다. 창사 이래 처음으로 설립된 전국단위 산하노조이다.
제4노조 진윤석 위원장은 연초부터 조합원 1만명 돌파를 목표로 제시해왔다. 이에 맞서 민주노총도 삼성전자 노조 설립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해 연말 기준 삼성전자의 정규직 직원 수만 10만 4605명에 달한다. 아직은 무주공산이다. 삼성전자 노조가 어느 쪽 노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양대 노총의 세력판도는 상당한 영향을 받을 공산이 크다. 이는 양대노총 간 세대결을 격화시킬 요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조는 열악한 조건에 처한 노동자의 집단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됐다. 하지만 삼성노조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길은 이 같은 역학구도와 정반대 지점을 선택하는 데 있다. 집단 이익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약자를 배려하고 상생하는 어려운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