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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의 패러다임 전환(7)

SK를 게임 체임저로 만든 ‘3가지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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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은 기자
입력 : 2020.08.26 07:29 ㅣ 수정 : 2020.08.26 08:42

최종현 선대회장의 3가지 경영철학 승계한 최태원 회장 / 26일은 최종현 회장의 22주기 기일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시대의 ‘비즈니스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기존의 제조업 기반을 고도화시키는 한편 인공지능(AI), 플랫폼비즈니스(Platformbusiness), 모빌리티(Mobility), 시스템반도체 등으로 전선을 급격하게 확대하고 있다. 새로운 먹거리를 선점함으로써 글로벌 공룡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대기업 특유의 ‘강력한 총수체제’는 이 같은 대전환을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뉴스투데이는 주요 그룹 총수별로 ①패러다임 전환의 현주소, ②해당 기업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③전환 성공을 위한 과제 등 4개 항목을 분석함으로써 한국경제의 새로운 가능성을 진단하고 정부의 정책적 과제를 제시한다. <편집자 주>

 

2019년 6월 경기도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2019 확대경영회의’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마무리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SK]
 

[뉴스투데이=오세은 기자] 한 기업이 수 십년에 걸쳐 성장을 거듭해왔다면 그 역사는 필연적으로 ‘혁신의 역사’이기 마련이다. SK그룹이 바로 그렇다. 고(故)최종현 선대회장이 지난 1973년 별세한 고(故)최종건 창업회장에 이어 수장이 됐을 당시만 해도 SK그룹(당시 선경그룹)은 재계 50위권이었다. 그로부터 47년이 흐른 26일 현재 SK의 시총은 136조원대이다. 재계 2위이다. 이날은 최종현 회장의 22주기 기일이기도 하다.

 

짧지 않은 한국 재계의 역사 속에서 SK는 대표적 게임체인저(game changer)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 원동력은 3가지 DNA로 압축된다. 1세대 기업인인 최종현 선대회장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된 3가지 DNA는 장남인 최태원 SK회장에 의해 경영권과 함께 승계, 발전돼왔다.

 

10년 이상 준비과정을 거치는 ‘지속적인 비즈니스 혁신’, 역발상 인수합병(M&A)전략을 통한 속전속결식 시장지배력 획득, 이익의 극대화를 넘어선 사회적 가치 추구라는 3가지 경영철학은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점철됐던 위기극복과 도전의 과정에서 위력을 발휘해왔다. 

  
[표=뉴스투데이]

■ DNA ① 30년 후 내다본 ‘비즈니스 혁신’=위기극복과 도전의 원동력으로 작동

 

우선 최종현 선대회장의 '비즈니스 혁신 DNA'는 SK그룹이 거둔 사업적 성과에 일반적 예상보다 넓고 깊게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11월 SK의 제약·바이오 자회사인 SK바이오팜(대표 조정우)의 성과만해도 그렇다. 이 기업이 개발한 뇌전증 치료제 엑스코프리™(XCOPRI®, 성분명: 세노바메이트)가 미국 식품의약국(FDA)로부터 신약승인을 받았다.

 

신약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개발, 신약허가까지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수행한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 바이오산업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SK바이오팜의 출발점에는 최종현 선대회장이 서 있다.

 

그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제약·바이오에 주목했다. 에너지·화학 산업의 뒤를 잇는 패러다임 전환이 태동된 것이다. 최종현 회장은 1993년 제약(Pharmaceutical)의 영어 단어 첫 음절을 딴 ‘P프로젝트’를 만들었다. 당시 국내 제약사들은 실패 확률을 낮추고 당장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복제약 시장에 주력한 반면 최종현 회장은 한국 최초의 신약을 개발한다는 신념에 정면 승부를 걸었다.

 

미국 뉴저지 및 중국 등에 관련 연구소를 수립하는 등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따라서 SK바이오팜이 팡파레를 울린 것은 30년 동안 지속된 혁신 DNA가 만들어낸 성과물인 셈이다.

 

이처럼 최소한 10년 후를 내다보는 혁신 DNA가 쉬지않고 작동됨으로써, 직물기업으로 시작한 선경이 석유화학·이동통신·반도체 그리고 바이오 사업에서까지 강자가 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새로운 먹거리 산업 진출이 객관적인 ‘위기 상황’에서 추동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경영학의 격언이 진실임을 SK의 성장역사를 통해 입증된 셈이다.

 

에너지·화학(SK이노베이션 대표 김준) 진출은 유가파동의 위기감이 가시지 않은 1980년에 이뤄졌고, 이동통신(SK텔레콤 대표 박정호) 진출은 1990년대의 정치적 특혜 논란을 정면돌파하는 방식으로 완결됐다. 반도체(SK하이닉스 대표 이석희) 진출도 글로벌 반도체 불황기에 던져진 승부수였다.  

 
폐암 수술을 받은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왼쪽 두 번째)이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산호 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 경제 위기 극복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제공=SK]

 

■ DNA ② 오랜 준비과정을 거친 ‘역발상 M&A’ 경영전략= 사우디 원유수급 능력을 토대로 ‘유공’ 인수/10년 준비한 이동통신사업 진출은 ‘시장경쟁’ 통해 정치적 특혜논란 정면 돌파 / 반도체 불황 시기 ‘하이닉스 인수’는 발상의 전환

 

오랜 준비과정을 거친 ‘역발상 인수합병(M&A)’은 SK그룹의 비즈니스 혁신을 성공시킨 핵심적 경영전략으로 꼽힌다. 치열한 경쟁시장에 진출하면서 기술개발을 시작한다면, 승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기술개발이 완료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하면 급변하는 시장상황보다 뒤쳐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유망한 기업을 과감하게 인수합병해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시장의 강자로 자리잡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최종현 회장은 비즈니스 혁신과 인수합병을 양대 축으로 작동시킴으로써 신시장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고, 이 같은 경영전략은 최태원 회장에 이르러 더욱 과감해지고 있는 흐름이다.

 

먼저 국내 최대 에너지·화학 회사인 SK이노베이션의 시초만 봐도 그렇다. 1980년대 당시 선경그룹은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해 ㈜유공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에너지산업에 진출했다. 하지만 유공 인수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게 아니다. 10여년 간에 걸친 노력과 준비의 산물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필두로 한 중동 산유국과의 돈독한 관계 구축, 이를 토대로 한 1970년대 오일쇼크 극복과정에서의 역할 수행 등이 뒷받침됨으로써 에너지산업에 성공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1973년 선경그룹을 이끌게 된 최종현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선경을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시킨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계열화’를 그 과제로 천명했다.

 

그는 이를 위해 1973년 일본 이토추 상사, 데이진과 공동투자로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했으나 복병을 만나 좌절하게 된다. 선경은 사우디로부터 하루 15만 배럴의 원유 공급 약속을 받았으나 그 해 10월 발생한 1차 석유파동으로 정유공장 설립계획은 무산됐다.

 

중동사태의 와중에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한국과 이스라엘의 우호관계를 이유로 한국을 석유 금수국가로 분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경의 석유사업 진출은 일단 좌절됐으나, 최종현 회장은 오일쇼크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정부의 요청에 의해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 접촉하는 한편 당시 중동의 원유 물량을 좌지우지했던 야마니 사우디 석유장관을 만나, 극적으로 한.사우디 합의를 도출해 낸다. 1973년 12월부터 한국이 수입해야할 원유 전량을 사우디가 공급하기로 한 것이다. 최종현 회장이 다져온 사우디 왕실 및 석유장관과의 인간적 친분이 국가적 위기의 해결사 역할을 해낸 셈이다.

 

5년 뒤인 1978년 12월 이란의 석유 수출 중단을 계기로 터져나온 제2차 석유파동 때도 최종현 회장의 역할이 요구됐다. 그는 1980년 야마니 석유장관과 회동, 또 다시 하루 5만 배럴의 공급 약속을 받아냈다. 바로 이 시점에 기회가 왔다. 유공 지분 50%를 확보하고 있던 미국의 걸프(Gulf)사가 그 해 8월 지분 전체를 매각키로 결정했고, 정부는 10월 유공 민영화 방침을 발표했다.

 

당시 정부는 △원유의 장기적·안정적 확보 능력 △산유국 투자 유치 능력 △산유국과의 교섭 능력 △증설 및 비축사업을 계획기간안에 완료할 수 있는 자금조달 능력 △경영관리 능력 등을 인수기업 조건으로 제시했다. SK는 삼성 등 강력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유공 인수기업으로 최종 선정된다.

 

이와 관련 SK 고위 관계자는 “당시 정부가 산유국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며 안정적인 원유 공급선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탓이었다”면서 “최종현 회장은 야마니 석유장관으로부터 선경이 정유사업을 하게 되면 필요한 원유를 공급하고 1억 달러를 대부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바 있어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만족하면서 경쟁자들을 앞섰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결국 정부는 유공 인수의 핵심인 ‘원유 확보 능력’과 ‘자금 조달 능력’ 측면에서 우수하다고 판단한 선경을 인수 주체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고(故) 최종현 SK 선대회장(왼쪽)이 1981년 초 내한한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오른쪽에서 두번째)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SK]
 

이동통신사업의 진출도 10여년의 준비 끝에 정치적 특혜 논란을 정면으로 불식시키고 시장경쟁을 통해 성공시켰다. 최종현 회장은 1984년 유공 경영이 안정된 후 ‘10년 후 먹거리’로 정보통신 분야를 낙점했다. 성장잠재력이 가장 크고 기존 업계와의 경쟁이 가장 적다는 판단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이동통신이 미래의 ‘블루오션’이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신설했다.

 

선경은 이후 착실하게 단계를 밟아 나갔다. △1989년 미국 현지법인 유크로닉스(Yukronics) 설립 △1990년 선경정보시스템 설립 △1991년 선경텔레콤 설립을 하면서 정보통신사업 진출 토대를 착실히 쌓았다.

 

1992년 4월 체신부가 제2이동통신사업 허가 신청 게시를 공표하자, 선경텔레콤은 대한텔레콤으로 사명을 바꾼 뒤 제2이동통신 사업권 입찰에 참여했다. 대한텔레콤은 1992년 8월 2위와 압도적인 점수차로 최종사업자에 선정됐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현직 대통령의 인척기업에 사업권을 허가한 것은 특혜라고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최종현 회장은 이 때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사업권을 획득한 지 일주일만에 자진반납했다. 당시 선경그룹 내부에서는 “10년 가량 준비하면서 이통사업을 할 능력을 갖췄는데 반납해서는 안된다”는 반발도 나왔으나, 최종현 회장은 “충분히 준비했고 실력을 갖췄으니 다른 기회가 올 것이다. 오해 받을 우려가 없는 다음 정부에서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결국 제2이통사업은 백지화돼 차기정부로 넘어가게 된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과 제1이동통신 사업자인 한국이동통신 민영화를 동시에 추진한다.

 

김영삼 정부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과정의 잡음 가능성을 의식해 “전경련이 머리를 맞대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하라”고 제안했다. 당시 최종현 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된 상황이었다. 선경을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추천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오랫동안 준비해 온 통신사업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이러한 딜레마 상황을 정면돌파한다. ‘황금알을 낳은 거위’로 불렸던 제2이통 사업자 경쟁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다. 대신에 한국이동통신 공개입찰에 참여, 당시 시세보다 4배 가까이 높은 주당 33만5000원(약 4300억원)에 지분 26%를 확보하면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의 최대주주가 됐다. 선경내부에서도 ‘지나치게 높은 가격’이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최종현 회장은 “회사 가치는 앞으로 더 키워가면 된다”고 설득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이 직물에서 시작한 SK의 사업영역을 석유화학과 이동통신으로 확대하는 기틀을 마련했다면 최태원 회장은 그 사업들을 고도화하고 반도체 산업이라는 또 다른 비즈니스 혁신을 성공시킨다.

 

SK하이닉스의 출발점도 텔레콤·이노베이션과 궤를 같이한다. 반도체 불황기에 시장 매물로 나온 하이닉스를 SK가 과감하게 인수했다.

 

자산규모가 63조원에 달하는 SK하이닉스의 원 소유주는 LG그룹이었다. 그러나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이후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대기업을 상대로 사업교환, 즉 ‘빅딜’을 압박했고 그 결과 1999년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반도체 산업이 불황기에 접어들었다. 이후 하이닉스는 현대그룹의 경영난으로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최태원 회장은 2011년 말 하이닉스를 전격적으로 인수했다. 당시 반도체 불황기에 대규모 투자를 경계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SK그룹 내에서도 부정적 의견이 팽배했다고 한다. 당시 반도체 글로벌 시장은 가격 하락으로 경쟁사들이 투자를 줄이고,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SK 역시 새로운 사업영역에 대한 대규모 투자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태원 회장은 최고경영자(CEO)로서 결단을 내렸다.

 

SK하이닉스는 SK의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올해 2분기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8조6065억원, 1조9467억원을 기록했다. 기회는 위기 속에서 잡는 법인 것이다.

 

■ DNA ③ 고 최종현 선대회장의 ‘사업보국’ 경영철학=최태원 회장의 ‘사회적 가치’, ‘행복경영’, ‘비재무적 가치’ 등으로 발전돼 / 재계 1세대의  ‘사업보국’ 철학, 가장 적극적 승계자는 최태원 회장

 

SK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드는 세 번째 DNA는 고 최종현 선대회장의 경영철학인 ‘사업보국(事業報國)’ 정신이다. 최태원 회장은 ‘사회적 가치’, '행복경영', '비재무적 가치' 등의 개념을 통해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최종현 회장 시절 한국재계는 1세대 기업인들이 이끌었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업보국’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러나 1세대 시대가 저물고 2·3세대로 교체되면서, 이 같은 기업의 역할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실천적 계획을 수립하는 기업은 SK이다. 최태원 회장은 “기업이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해야 시장에서 진정한 신뢰를 얻어 발전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발신하고 있다.

 

최종현 회장은 그만큼 사업보국에 대한 실천의지가 강했다. 그는 “우리는 사회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기업의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그는 1997년 말 외완위기 상황 속에서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산소 호흡기를 단 상태에서 청와대를 방문해 특단의 조치를 건의하거나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기업인의 국가적 역할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해 10월 28일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대중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겸한 번개 행복토크를 열고 구성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SK]
 

최종현 회장은 사업보국을 위해 가장 중요한 실천적 과제로 ‘인재양성’을 꼽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1974년에 ‘세계적 학자 양성’이라는 목표를 갖고 사재를 출연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산업이 발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계 50위권에 그쳤던 기업으로서는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 재단은 지난 2019년 말 기준으로 국내에서 3500여명의 장학생을 지원했고, 해외 명문대학 박사 780여명을 배출했다.

 

1970~1980년대에 어렵게 공부했던 한국의 대학교수 및 지식인들에게 한국고등교육재단은 든든한 원군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고등교육재단 설립과 관련, “1960년대 미국 유학시절 이스라엘이 강소국(强小國)이 된 배경을 궁금해했다”면서 “대한민국처럼 자원이 부족하고 인구도 적은 이스라엘이 미국 사회에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와 사회가 합심해 인적자원을 개발했고, 이들이 요로에 진출하면서 국가 브랜드를 키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재단 설립을 결심하게 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최종현 회장이 1973년 청소년 대상 교육 TV 프로그램인 ‘장학퀴즈’에 단독 광고주로 나선 것도 의미있는 결정이었다. 당시 청소년들은 장학퀴즈를 시청하면서 성장기를 보낼 수 있었다. 현재 SK가 후원한 장학퀴즈 출신들은 학계, 재계,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 등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 오피니언 리더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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