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펀드 수탁 거부에 ‘사모펀드 수난시대’
수탁·판매 책임 둘다 지는 은행권…강화된 책임론에 부작용도
[뉴스투데이=변혜진 기자] 잇단 사모펀드 사태가 터지면서 금융당국이 펀드 수탁사·판매사의 운용사 감시 의무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이중책임을 지게 된 은행권이 펀드 수탁을 거부하면서 사모펀드 업계가 난항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은행권에서 마련하는 내부 지침과 관련 인력 등의 비용이 사모펀드 수탁 수수료를 높이게 돼 고객 부담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또한 중소기업 등의 주된 자금조달 채널도 막히면서 이들의 성장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업계와 금융당국이 사모펀드 규제 강화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 등을 충분히 논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은행 등 비전통자산 펀드 신규 설정 ‘난감’/ 수탁사·판매사 등 은행의 운용사 감시 ‘이중책임’ 부담
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등 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은행 등 금융지주사의 계열사 은행들이 부동산, 국내외 대체자산 등 안정성이 떨어지는 비전통자산에 대한 펀드 신규 설정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자산운용사에서 펀드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은행 등에 자금을 수탁해야 한다. 은행은 운용사 지시에 따라 펀드 자금을 보관·투자·관리하는 소위 ‘금고지기’ 역할을 맡게 된다. 펀드는 이 과정을 거쳐 은행·증권사·보험사 등 판매 채널까지 내려가게 된다.
현행 자본시장법 247조에서는 펀드의 재산을 보관·관리하는 신탁업자의 역할을 감시 의무까지 규정하고 있지만, 지난 2015년 금융당국이 사모펀드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며 사모펀드에 한해서는 수탁사 의무를 특례 조항으로 면제해준 바 있다. 즉 운용사의 펀드 운용과정을 감시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임사태에 이어 옵티머스 사태까지 터지자 금융감독원은 수탁사에 사모펀드 관리를 넘어 운용사 감시 의무 부과에 나섰다.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사모펀드 감독 강화 및 전면점검 관련 행정지도’는 지난 12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수탁사는 매월 1회 이상 사모펀드가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운용사가 설정한 펀드의 자산보유내역(편입자산의 종목명 포함)을 교차 비교해 이상이 있는지 점검해야 된다. 이상이 발견되면 곧바로 금융감독원에 보고해야 한다.
수탁사와 판매사 업무를 동시에 맡고 있는 은행으로서는 ‘이중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판매사 역시 펀드 운용사와 펀드에 대한 사전점검, 운용점검, 사후점검 등 강화된 3단계 감시·견제 지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부실 펀드가 발생했을 경우 배상에 대한 부담도 두배로 늘었다. 판매사는 선제적 보상안을 마련해야 하며, 수탁사는 감시 의무를 소홀히 한 데 대한 일부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
업계 관계자 A씨는 “아직 행정지도 수준이지만 은행이 판매사와 수탁사의 책임을 둘다 지게된만큼, 내부 지침을 마련하고 적용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행정지도를 따르려면 관련 인력 보강도 필요하기 때문에 신규 펀드 수탁업무 등을 보다 신중히 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업계 관계자 B씨 역시 “수탁사에서 평가를 통과한 펀드가 판매 채널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며, “결국 수탁 자체를 더 보수적으로 맡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수탁사 보수↑ → 자산운용사·고객에게 전가, 중소·벤처기업 자금조달줄도 막힐 위험
지난 6일 기준 사모펀드 상위 수탁회사 순자산 규모는 NH농협은행(83조1000억원), KB국민은행(72조6000억원), 신한은행(72조2000억원), 하나은행(50조1000억원), 우리은행(44조4000억원) 순이다.
당분간 이들 은행은 대부분 국내 주식, 국채 및 회사채 등과 같은 리스크가 적은 전통자산에 한해서 사모펀드 수탁서비스를 제공할 방침이다.
사모펀드 전체 판매 규모는 이미 크게 줄어들고 있다. 실제 지난 7월말 기준 개인 대상 사모펀드 판매잔고는 19조7000억원으로, 라임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인 지난해 6월과 비교했을 때 7조원 이상 급감했다.
업계에서는 금융당국의 높아진 규제 수위에 대응하는 비용이 고객 부담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B씨는 “수탁사가 가져가는 보수 대비 의무·책임이 늘어나면 자연히 수탁업무를 안 맡거나 해당 비용을 기존보다 높게 설정할 수 밖에 없다”며, “이는 결국 펀드를 설정하는 자산운용사에게는 수수료 부담으로, 고객에게는 더 높은 비용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현재 은행의 사모펀드 수탁 수수료율은 2bp(0.02%) 수준이지만 2배에서 많게는 10배 이상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이에 더해 사모펀드 투자가 막히면서 중소기업의 자본 조달 선택지도 줄어들 수 있다. 중소·벤처기업 등에 집중 투자하는 코스닥벤처펀드의 경우 7월 말 기준 설정액 2조9700억원 가운데 83.8%(2조4900억원)가 사모펀드에서 조달됐다. 그만큼 사모펀드의 역할이 큰 것이다.
A씨는 “신용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중소기업들은 대출형 사모펀드(PDF·Private Debt Fund) 등으로 자본 조달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모펀드 업계가 정체되면 관련 기업 생태계도 경색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업계에서는 금융당국이 수탁사 등에 대한 책임 강화에 따른 부작용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B씨는 “아직 법제화까지 시간이 남은만큼 운용사, 수탁사, 판매사의 사모펀드 책임 수준에 대해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A씨는 “라임과 옵티머스 사태로 이미 침체된 사모펀드 업계가 사장되지 않도록 함께 해법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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