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 선진국 벤치마킹해 ‘진짜’ 신속획득제도 도입해야
한국의 방위산업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방위사업청은 지난해부터 방위산업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인 제도 개선과 함께 법규 제·개정도 추진 중이다. 그럼에도 방위사업 전반에 다양한 문제들이 작용해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뉴스투데이는 이런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진단하는 [방산 이슈 진단]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편집자>
[뉴스투데이=김한경 안보전문기자]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미래의 무기체계를 선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 발전 속도에 맞춰 무기체계 획득 제도도 변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다양하게 제기되는 상황이다.
이런 문제를 인식한 방위사업청은 지난해 ‘신속시범획득’ 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는 창의적 신기술이 적용된 민간 제품을 구매하여 군에서 시범 운용한 후 소요 결정과 연결하여 후속 물량을 신속히 전력화하는 것이다. 방사청은 지난 6월 “군사적 활용성을 인정받고 소요가 결정된 무기체계에 대해 후속 물량을 신속히 획득할 수 있도록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장원준 박사, 구매에서 연구개발·시제품 제작·성능개량까지 확대해야
하지만 지난달 25일 한국방위산업학회가 개최한 ‘방산정책 포럼’에서 ‘신속시범획득사업 활성화를 통한 선도형 방위산업 추진 전략’ 제하로 발표한 장원준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완제품을 구매하여 시범 적용해 보는 수준에 머물러 시범사업이 종료되면 다시 기존 획득 절차에 따라 중기 또는 긴급 소요로 반영해야 한다”면서 “수의계약으로 후속 양산사업 연계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발전방향으로 “미국의 신속획득제도와 국방조직 혁신 사례를 벤치마킹해서 선진국 수준의 신속획득 법령 제정과 신속획득 절차·조직을 신설하되, 현행 신속시범획득사업은 수정 보완을 통해 정규 획득사업으로 제도화하고, 일정기준 충족 시 참여업체에게 후속 양산사업에 대한 우선권 또는 가점 부여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중장기적으로는 신속획득사업 범위를 현 시범 운용을 위한 구매 사업에서 미국처럼 연구개발, 시제품 제작, 성능개량 사업까지 확대하고, 나아가 기존 획득절차와 동등한 수준으로 발전시켜 소요군이 사업 특성에 따라 기존 획득절차와 신속획득사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나상웅 부회장, 신속 성능개량 도입하고 신속시범획득도 활성화해야
이 발표가 있기 하루 전인 24일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국민일보가 공동 주최한 ‘4차 산업혁명을 통한 디지털 강군, 스마트국방 포럼’도 열렸다. 이날 ‘4차 산업혁명과 연계한 방위산업 발전방향’ 제하로 발표한 나상웅 한국방위산업진흥회 상근부회장도 방위산업 육성 방안 10가지를 제시하면서 신속획득제도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미국, 중국, 일본, 이스라엘 등 방위산업 선진국들의 혁신 사례를 소개하면서 “특히 미국은 업체의 5장짜리 약식 제안서만으로 90일 내 사업계약이 체결되고 2년 이내 무기 시제품을 개발하며, 개발 성공 시 후속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이 있다”면서 “우리는 국방획득 절차의 복잡성·경직성·폐쇄성 때문에 4차 산업혁명 기술을 방산 분야에 적용하기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나 부회장은 획득절차 개선 방안으로 “전력화 후 일정기간이 경과하면 평가를 거쳐 2∼5년 이내에 성능개량을 완료하는 신속성능개량 제도를 도입하고, 현행 신속시범획득사업도 최초 과제 선정부터 소요군을 적극 참여시키며 시범사업 업체와 수의계약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정홍용 전 소장, 긴급한 작전 소요 충족할 다양한 획득 모델 만들어야
또한, 정홍용 전 국방과학연구소장(예비역 육군중장)은 최근 기자와 만나 “기존의 획득 시스템은 변화하는 환경에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시스템의 정비가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면서 “군의 필요성과 무기체계 특성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할 수 있고 긴급한 군의 작전 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획득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기존의 하드웨어 중심 프로그램 외에도 국방 독자 소프트웨어(S/W) 중점 프로그램, 점증적 배치 S/W 중점 프로그램, 신속획득 프로그램, 혼합형 획득 프로그램 A/B 등 6가지 획득모델을 갖고 운영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S/W 성격이 강한 무기체계는 획득절차와 사후관리가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원준 박사와 정홍용 전 소장이 강조했듯이 4차 산업혁명 기술의 특성과 발전 속도에 맞게 다양한 획득모델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시범 운용에 급급하면서 마치 곧바로 신속 획득이 이루어질 것처럼 모양만 내고 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모델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지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일부 전문가들은 “국방에 적용 가능한 혁신적 민간기술을 식별해 신속히 시제품을 만들고 전투실험을 통해 체계개발로 연계하는 프랑스 국방혁신국(DIA)의 획득 방식이 우리가 현재 시행 중인 신속시범획득사업보다 효율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상용 제품이 군의 요구사항을 충족하기 어려우니 시범 운용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 우리 실정에 맞는 제도 빨리 만들고 시행하면서 문제 보완 바람직
한편, 국방부는 지난 7일 국정감사 업무보고에서 5가지 국방정책 중 하나로 ‘4차 산업혁명 기술의 국방분야 적용’을 포함시켰다. 그 내용 중에 “신속시범획득사업의 효율적 추진으로 신속획득체계를 정착하고, 이를 기반으로 무기체계 특성에 따른 모듈형 전력화 및 S/W중심형 전력화 등 유연하고 다양한 획득방식 제도화를 검토하겠다”는 문구가 들어있다.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말뿐이 아닌 진짜 신속획득제도가 도입돼야 한다. 일각에서는 신속시범획득에서 시범이란 단어를 떼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방산 전문가는 “시범이란 단어를 굳이 넣은 이유를 찾자면 신속획득으로 바로 가기에는 자신이 없었거나 시범 운용 후 전력화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기술은 급속히 변해 가는데 유연한 획득방식을 이제 ‘검토’하겠다는 국방부의 자세는 시대 흐름을 너무 안이하게 바라보며 지나치게 실패를 우려하는 것 같다”면서 “선진국 제도를 벤치마킹하되, 업체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우리 실정에 맞는 신속획득제도를 하루빨리 만들고 시행하면서 문제가 나오면 지속 보완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나상웅 부회장은 발표의 마지막 장에서 “성공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보다 훨씬 많은 실패를 저지르며, 그것이 바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앤드류 매튜스(동기부여 전문가)의 말을 인용했다. 이처럼 국방부와 방위사업청도 실패를 두려워하면 성공할 수 없으며, 지금이라도 실패를 통해 배우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