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인간'과 '인공인간'이 갈등한다고? 그들은 모두 소외된 존재
■ ‘진짜 인간’과 1+1으로 태어난 ‘인공’의 일자리 찾기/신분은 다르지만 동일한 '사회적 소외'에 처해
영화는 200년 후의 미래를 그리지만, 인구 감소로 쇠락하던 도시를 과거의 모습으로 복구했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거리의 풍경이 오늘날과 똑같다. 딱 한 가지 추가된 SF적인 요소는 ‘인공인간’이라는 존재뿐이다.
동행자인 ‘인공’은 원본에게 버려진 ‘인공 인간’이다. 보호단체 덕분에 생체실험용으로 쓰일 위기에서 벗어나 시설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먼저 세상에 나간 친구에게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참 좋은 거라더라“라는 말을 듣고 사회로 나왔다. 자신이 잘하는 게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순수하고 긍정적이다. 평범하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지만, 주인공에게 “요즘은 진짜 인간도 그렇게 못 산다”라는 핀잔을 듣는다.
■ 사람의 쓸모란 무엇일까? 사람은 왜 사는 걸까?/질문을 던지지만 해답은 제시 안해/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의 가치 암시
대량생산된 부품의 잉여분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구직자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막연히 ‘미래에는 더 나아지겠지’ 생각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암울하게도 200년이 지나서까지 사람들이 똑같은 괴로움 속에 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살아가는 그들은 각자 입장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누군가는 고용주의 기준으로 사람의 쓸모를 평가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누군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영화는 누가 맞는지 답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그저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 관객 스스로 다양한 생각을 해보게 한다.
일자리가 사라진 이유가 과연 인공인간 탓일까? 인공인간은 버려지면 생체실험 재료로 쓰일 만큼 기본적인 인권도 없다. 주체적으로 빼앗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책임이 있는 대상은 애초에 인공인간을 과잉생산한 주체들일 것이다. 부품을 넘쳐나게 만들어 각자를 싼값으로 떨어뜨리고, 남은 잉여분의 삶을 책임지지 않았다.
거리에 늘어선 건물들은 까마득히 높고 커다랗다. 그에 비하면 도시를 떠도는 주인공과 인공은 개미처럼 작게 보이고, 암담한 현실을 스스로 바꾸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사실 사람들의 욕망은 순수하다. 그들은 단지 사랑하고 행복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분명 그러했는데, 세상의 구조가 그 욕망을 덫으로 만들어버린다.
‘미래를 향한 희망’, ‘사랑’, ‘꿈’ 등은 힘겨운 오늘을 버티게 하는 힘이지만, 동시에 삶을 소모하게 하는 허상일 수도 있다.
영화는 결말부까지 이런 팍팍한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이 벗어날 방법을 직접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누군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켜봐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조금은 따뜻해질 수 있다는 암시를 준다. 그것이 이 영화가 만들어진 이유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