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68)] 언어 장벽을 넘은 연합작전과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 전투(상)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12.08 14:53 ㅣ 수정 : 2020.12.09 08:58
휴전협상시 군사분계선 확정 앞두고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격렬한 전초진지 접전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1952년 말의 6·25남침전쟁 상황은 78만의 유엔군(이중 한국군 12만명)과 1백20만의 공산군이 팽팽히 대치한 가운데 군사분계선 책정에서 피아간에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데 혈안이었다.
물론 미국의 ‘명예로운 휴전협상’정책에 따라 전선이 대체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게 사실이지만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의 백마고지와 저격능선에서 치열한 교전 중에 있었고, 임진강을 낀 서부전선의 국군 1사단지역에서도 군사분계선 확정에서의 요지확보를 위한 전초진지 ‘노리’고지 등에서 중공군과의 격렬한 접전이 전개됐다.
■ 국군 1사단, 휴전까지 임진강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 계속
1952년 9월경 국군 1사단은 미3사단의 작전권을 인수해 임진강과 역곡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지역은 미 1군단과 중공군 46, 47, 56군의 도합 3개 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4개 사단으로 편성된 미 1군단 내의 유일한 한국군인 1사단은 미 2·해병 1사단, 영 연방 1사단에 뒤질 수 없다는 각오였다. 또한 수도 서울로 이르는 관문을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임진강변의 제 전초 고지들을 사수하겠다는 강한 전투의지로 임했다.
북진 때부터 계속 서부 전선에서 싸워 온 국군 1사단은 이 지역 지리에 익숙한 데다 막강한 미군 화력과 탱크의 지원을 받는 연합작전으로 중공군과의 고지전에서 개가를 올렸다.
미군 측에서는 강 건너의 조그만 진지들을 가지고 많은 전사·상자를 내면서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을 할 것이 아니라 임진강 이남의 주 저항선을 안전하게 방어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2년7월 지리산 공비 토벌에서 돌아온 1사단은 박림항 준장의 지휘아래 그간 미군들이 잃은 전초 진지들을 모두 탈환하면서 휴전까지 임진강 일대의 노리·퀸·베티·171 고지 등에서 공방전을 계속했다.
당시 1사단 정면에는 대치 중인 중공군 47 군은 국민당군의 투항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로 산악전에 능숙했다. 그러나 폭격으로 보급이 끊기면서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10월6일, 중공군이 맹렬한 포격을 가해왔다. 국군은 텟시고지외 닛키고지에 방어병력을 배치했고 중공군은 2개중대 규모로 나누어 이 두고지를 공격했다. 국군은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고지가 점령될 위기에 처했다.
국군은 두 고지가 점령된 것으로 판단하고 이 두 고지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지만 중공군의 저항에 좌절됐다. 몇 시간후 국군은 박격포와 항공지원을 받아가며 고지를 공격했지만 중공군은 이번에도 격렬하게 저항해왔다.
또 공격이 실패하자 다음날, 항공 및 전차의 지원을 받아가며 닛키고지를 공격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국군은 총 6번의 공격을 감행했는데 모두 실패하고 군단장은 손실만 커진다고 판단하여 역습을 중지하고 재편에 들어갔다. 이에 국군 1사단은 105고지-베티고지-소노리고지에 부대를 배치했다.
12월11일에 또 중공군이 선공을 해왔다. 중공군은 소노리고지와 베티고지를 향해 공격해왔고 소노리고지는 중공군에게 점령되지만 베티고지는 방어에 성공했다.
국군은 소노리고지에 역습을 개시했는데 격퇴당했고, 다시 병력을 모아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번에는 일시적으로 고지를 점령하지만 중공군의 역습에 고지를 빼았꼈다. 1사단장 박림항 준장은 소노리고지 점령의 발판인 대노리고지 점령의 필요성을 느꼈다.
국군 1사단은 유엔군의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으며 대노리고지를 일시적으로 확보했다. 다음날도 소노리고지와 대노리고지에 공격을 다시 시작했는데, 소노리고지를 공격하던 11중대는 약간 주춤했지만 13일에 소노리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강력한 역습으로 대노리고지 확보는 다시 실패했고. 국군 1사단은 소노리 고지에서 계속 방어하게 됐다.
■ 언어 장벽을 넘은 한미군의 보·전·포 삼위일체 공격으로 한미 연합작전의 개가
당시 노리고지 전투를 지휘했던 1사단장 박림항 준장(예비역 육군중장)을 비롯한 한국군들은 ‘52년 말 6·25남침전쟁의 휴전협정이 머지않아 성립될 것이라는 뉴스가 나도는 가운데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겠다는 집념이 대단했다.
이를 위해 적정을 파악하려고 포로 잡기 경쟁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노리고지 같은 전초에서는 아군과 중공군 사이에 서로 포로를 잡기 위한 경미한 수색전이 늘 벌어졌다.
포로 잡기 탐색전이 항상 전개되고 있던 소노리고지는 적의 전초인 대노리고지와 한 능선에 붙어 있었는데 1사단은 이 고지에서 언젠가는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한 보·전·포 협동작전을 미군들과 계속 익히고 있었다.
특히 박 사단장은 사단예비대인 최주종 11연대장에게 백병전에 대한 연구를 시켰다. 지금처럼 태권도가 널리 보급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당시는 몰랐기에 개머리 판치기, 수류탄 ·연막탄 사용법, 유도 등의 갖가지 훈련을 후방에서 맹렬히 했다.
노리고지 전투는 한마디로 우리 1사단의 보병과 미군의 탱크와 포병 부대가 삼위일체가 돼 전개한 모범적인 보·전·포 협동 및 한미 연합작전이었다.
8부 능선에 올라 붙은 우리 돌격 장병들은 포판을 등에 지고 미군 직사포의 근접포격 지원을 받으며 고지 정상으로 뛰어올라갔다. 돌격 대원들은 백병전이 벌어지면 호가 좁아서 개머리 판치기가 잘 안되니까 M-1소총의 개머리판을 잘라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고도의 훈련과 정확한 관측이 요구되는 이 같은 작전을 우리 장병들과 미군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멋있게 해냈다.
따라서 노리고지 전투는 모범적인 보·전·포 협동작전으로 당시 미국 보병학교의 교지에도 소개됐다. 이 전투를 지켜본 미군 고위장성들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했고 또 신뢰하게 됐으며, 한국군은 이제 포와 전차 지원만 해주면 충분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사병들의 용맹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전우애 이상의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8부 능선에서 적의 수류탄 반격에 막혀 더 이상 못 올라가는 사병들에게 돌격의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전우의 죽음을 호소해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최고였다.
박 사단장은 관측소에서 쌍안경으로 능선의 사병들이 적의 수류탄에 팔·다리가 날아가는 게 보일 때마다 다른 사병들에겐 전우의 전사를 호소하며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돌격케 했다.
노리고지 전투는 중대·대대 단위의 소규모 작전이었는데 박 장군은 늘 사단 단위의 대규모 작전을 하고 싶어했었다. 그러나 상급 부대에서는 희생자가 많이 나서는 안 된다면서 그런 전투는 무리한 작전이라고 못하게 했다며 아쉬워했다. (중편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