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이 수지맞는 '유통 대개혁', 농협판 '네이버'가 이끈다
NH농협이 오는 8월 15일로 창립 60주년을 맞는다. 지난 해 취임한 이성희 농협중앙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60주년을 계기로 새로운 100년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이 제시한 개혁과제는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유통 대변혁이다. 중간 유통마진을 최소화함으로써 농민은 생산물을 제값에 팔고 소비자는 합리적 가격에 구매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디지털농업 개혁을 통해 농업을 미래유망산업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셋째, 획기적인 재무구조 개선을 통한 과감한 미래투자이다. 모든 개혁에는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다. 올해로 72세의 노익장인 이 회장의 개혁드라이브가 성공할 경우, 한국 농민의 삶은 대전환을 맞이할 전망이다. 그 개혁의 현주소와 과제를 3회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이채원 기자] NH농협은 1961년 탄생과 동시에 농민에게 안정적인 판매시장을 제공했다. 공판장이 그것이다. 부산 농산물공판장을 시작으로 1962년에 서울, 대구, 광주 등에도 농협공판장이 생긴다. 초기적응 과정을 거치며 1970년대에는 농산물거래의 중심지로 자리잡게된다. 이는 농수산물공판장으로 남아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공판장은 기형적인 유통구조를 만들었다. 농민은 중간유통상인과 거래를 해야 한다. 땀흘려 수확한 농산물의 가치를 중간유통상이 더 많이 취하는 구조가 고착화됐다. 유통상들은 농산물을 싼값에 사들여서 비싼 값에 팔아왔다. 농민과 소비자 모두 불만족스러운 시장이 됐다.
■ "양파 값의 88%는 유통업자가 가져가" / 이성희 회장, '유통 대변혁은 새농협의 최대과제"
이후 가락시장과 같이 지역마다 생겨나는 농수산물도매시장도 공판장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지만, 이익배분구조의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다. 2019년 기준 농가의 ‘농업소득’은 1026만원에 불과했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청년층의 귀농을 촉진하기 위해 각종 경제지원을 내놓고 있지만 농촌을 되살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농민이 땀의 가치에 보답을 받는 농산물 유통구조 혁신이 이루어질 때 귀농시대는 실현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농업이 수지맞는 사업이 될 때, 농촌의 손짓이 청년들에게 매혹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관계자는 11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통상적으로 농산물에서 생산자가 가져가는 비율이 어느정도 되냐”는 질문에 “농산물마다 가격도 다르고 유통구조가 다르지만 배추와 무의 경우에는 유통업자가 가져가는 비율이 70%가 넘고 양파의 경우 88%가 넘는 경우가 많다”며 “농산물 가격 중 절반 이상이 유통업자 수익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기형적 구조는 수십년째 방치돼왔다. 소비자라는 다수의 이익은 농민과 소비자간의 직거래에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직거래의 실현은 어려운 과제였다. 중간유통망을 점유해온 기득권 계층의 반발뿐만 아니라 부패하기 쉬운 농산물 직거래시스템 구축의 어려움도 걸림돌이었다. 이 2가지 난제 중 직거래시스템 구축의 어려움은 산업전반의 급격한 디지털화 덕분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이성희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유통대변혁이라는 개혁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혁신이 동반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이 회장은 "농업인이 농산물을 제값에 팔고 소비자가 힙리적인 가격에 구입하는 올바른 유통구조를 만드는 일은 농협 본연의 역할이면서 핵심역량"이라면서 " 유통개혁을 새로운 농협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흔들림없이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회장은 "디지털확산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디지털역량은 농업, 농촌과 농협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통 대개혁의 방법론이 디지털화에 있음을 명시한 셈이다.
■ 수많은 쇼핑몰 아우르는 '농협 상품소싱 오픈플랫폼', 80대 고령농민도 직거래할 수 있도록 구축돼
실제로 농협은 2020년 ‘온라인농산물거래소’를 만들어 유통구조 개혁을 시도했다. 출하자인 농민이 직접 온라인으로 품목을 등록한 뒤 중도매인 혹은 경매 참여자들이 가격을 부르는 온라인 시장이다. 하지만 온라인 판매라는 점 이외에는 기존의 공판장식 유통구조와 달라진 점이 없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농산물을 중간유통상인들이 구매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농협은 근본적 유통개혁을 위해 지난 해 5월 ‘올바른 유통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농협 안팎의 유통 전문가들이로 구성된 이 기구는 국내 농축산물 생산·유통의 중요 현안에 대해 논의, 총 66개의 유통개혁과제를 도출했다. 이를 토대로 지난 해 11월 오프라인 중심의 도소매사업을 온라인 중심으로 전환하고 협동조합 정체성에 부합하는 농축산물 판매확대 방안을 마련했다.
그중 산지농협 온라인사업 육성이 핵심이다. 농산물 온라인 직거래 장터인 '농협 상품소싱 오픈플랫폼'을 구축해 농민과 소비자가 직거래하는 온라인 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 해 시범서비스 기간을 거친 이 플랫폼은 오는 6월 말∼7월초에 공식 오픈될 예정이다.
이 플랫폼은 국내 최대규모의 온라인 장터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수많은 산지 농협몰뿐만 아니라 네이버와 카카오 소핑몰, 쿠팡 등과 같은 대형 온라인 쇼핑몰도 입점한다.
고령층이 많은 농민들은 그동안 온라인 쇼핑몰 입점에 기술적인 어려움을 겪어왔다. 사업자등록부터 개별온라인 쇼핑몰과의 계약체결들은 농민이 소비자와의 직거래를 하는 데 현실적인 장애물로 꼽혀왔다. '농협 상품소싱 오픈플랫폼'은 농민들이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한꺼번에 많은 온라인 쇼핑몰에 자신의 농산물을 등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이다.
즉 산지 농업인이 사업을 신청하면 온라인 지역센터에서 원산지 표시, 식품위생 등 상품개발과 품질을 관리해준다. 나아가 상품소싱 오픈플랫폼을 통해 마케팅과, 주문관리 등의 지원을 받는다. 농협은 다양한 온라인 쇼핑몰의 입점등을 추진하고 있다.
80대 고령 농민도 산지 농협몰, 네이버몰, 쿠팡 등에 수확물을 상품으로 내놓고 소비자에게 제 값을 받고 팔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네이버몰과 쿠팡도 농산물 직거래하려면 '오픈 플랫폼'과 협업해야?
따라서 '농협 상품소싱 오픈플랫폼'은 농협이 만든 '제2의 네이버'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한국인이 네이버에 접속해 수많은 언론사의 기사를 읽듯이, 소비자들이 오픈플랫폼에 들어가 수많은 쇼핑몰에 등록된 농산물을 구매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농협 관계자는 “디지털을 통해서 산지의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온라인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온라인마케팅 허브로 육성할 예정”이라며 “기존 벤더상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농업인과 산지농협이 자생적으로 온라인 판로를 확장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산지농협의 자체몰을 통한 판매와 함께 대형 온라인 유통사와의 판매를 동시에 지원한다”며 “기존 소규모 직거래 온라인 시스템 등을 참고해서 지역별로 산지가 자체적인 콘텐츠로 판매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 농민이 보상받는 유통 대개혁, '귀농시대' 실현할까
농협은 산지농협 농민들의 상품정보 콘텐츠 제작, 마케팅, 배송 및 정산관리등까지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전문성과 기술적 지식 부족으로 인해 앞으로 활성화될 소비자와의 온라인 직거래에서 소외되는 농민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이다.
이와 관련해 '온라인 산지 어시스턴트' 제도가 도입된다. 산지 농협 및 농민들이 오픈 플랫폼을 이용하려면 자신의 농산물 사진 및 스토리를 담은 콘텐츠를 제작해 올려야 한다. 또 이 콘텐츠와 함께 온라인 쇼핑몰에 상품등록도 해야 한다. 이러한 실무적 작업을 지원해주는 인력이 산지 어시스턴트이다. 어시스턴트는 현지의 경쟁력있는 농산물을 개발하는 임무도 갖는다.
농협은 2025년까지 시군단위로 200여명의 산지 어시스턴트를 운영할 계획이다. 농협 관계자는 “4차산업혁명의 변화와 디지털 혁명이라는 세계적인 흐름도 유통업계의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생각한다”며 “중간 유통업자들이 가져가던 농민의 본래 권리를 디지털을 통해 찾아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성희 회장의 유통 대개혁이 본 궤도에 오를 경우, 농업은 수지맞는 직업으로 진화할 공산이 크다. 공판장에서 100원 받았던 농산물을 '농협 상품소싱 오픈플랫폼'에서 200원에 팔 수 있다면, 농민의 부는 빠르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청년층의 귀농열기도 뜨거워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