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의 JOB채(63)] ‘계층론’ 깬 카카오 김범수에게 관찰되는 3가지 성공법칙

이태희 편집인 입력 : 2021.08.01 07:35 ㅣ 수정 : 2021.08.01 09:12

'벼락거지 시대'에 반항하고 싶은 청춘들이 관심 가져볼 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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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 김범수 이사회 의장.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이태희 편집인] 카카오 창업자인 김범수(55) 이사회 의장이 한국 최고 부자에 오른 것은 절망적인 ‘계층론’을 파괴해주는 통쾌함을 선물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29일(현지시간) “134억달러(약 15조4000억원)의 순자산을 보유한 김범수 의장이 121억달러(약 13조9000억원)에 그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제치고 한국 최고 부자에 등극했다”고 보도했다.

 

흔히들 자본주의사회에서 계층상승을 위해서는 최소한 3대에 걸쳐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한다. 신분상승이 어려운 대다수 사람들 간에는 일종의 ‘정설’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자수성가한 사업가인 김 의장은 당대에 이재용(53) 부회장보다 더 큰 부를 일구었다. 정설을 가까스로 극복한 정도가 아니다. 보란 듯이 깨부수었다. 

 

■ ‘흙수저’ 김범수가 부를 일군 속도, 삼성가문보다 3.7배 빨라

 

그의 창조적 파괴는 아파트값 급등과 취업난으로 한국청년들이 스스로를 ‘벼락거지’라고 자조하는 시대라서 더욱 화제가 된다.

 

김 의장은 ‘훍수저’ 출신으로 규정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흙수저 출신이 한국 최고의 금수저 가문 후계자인 이 부회장보다 더 큰 부자가 됐다는 사실은 희망적이고 감동적이다.

 

이 부회장의 부는 3대에 걸쳐 형성된 결과물이다. 조부인 이병철과 부친인 이건희라는 걸출한 기업가가 그 토대를 닦고 혁신을 거듭해왔다. 이 부회장 스스로도 대단한 능력자이다. 삼성전자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글로벌 초일류 기업의 위치로 안착시킨 것은 이 부회장의 공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병철이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창업한 게 1938년이다. 오늘날 이 부회장의 부가 만들어지기까지는 83년이 걸렸다.

 

이에 비해 김 의장은 1998년 첫 창업을 했다. 23년만에 현재의 부를 성취했다. 부의 창조 속도 면에서도 3.7배 정도 빠르다.

 

어린 시절 스토리를 보면, 빈곤했던 시대상을 감안해도 김 의장은 최하단의 흙수저 계층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부친은 전라남도 담양의 농부 출신이다. 농사를 짓다가 무작정 상경을 했다. 1960년대에 서울 성동구 모진동(현 광진구 화양동)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측된다. 김 의장의 출생지가 이 곳이다.

 

지금은 준강남권으로 불릴 정도로 부유한 동네로 꼽히지만 당시만 해도 대표적인 빈민촌 중의 하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밀어붙인 강남 개발과정에서 압구정동, 금호동 등과 비슷한 ‘반전의 역사’를 공유한 동네인 셈이다.

 

김 의장은 2남 3녀 중 셋째이다. 부모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8명의 가족이 단칸방에서 살았던 흙수저’라는 표현이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또 부모가 생계로 바빠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

 

부친이 한 때 정육 도매업으로 집을 장만하기도 했으나 부도가 났다는 스토리로 비추어 볼 때 거주지 인근에 있던 마장동 도축장에서 고기를 떼다가 팔았을 것으로 보인다. 계급론적으로 보면, 도시빈민이다.

 

그 계급적 한계를 단박에 극복할 수 있던 비결을 김 의장 본인이 말한 적은 없다. 그래도 그의 인생 스토리에서 윤곽은 잡힌다. 철저하게 현실적 관점에서 볼 때, 세 가지 성공법칙이 관찰된다. 이 법칙을 인과관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 상관관계가 형성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벼락거지 시대'에 격하게 반항하고 싶은 청춘들이라면 관심을 가져볼 만 하다.

 

■ ‘SKY 이공계 법칙’

 

첫째, ‘SKY 이공계 법칙’이다. 흙수저가 당대에 금수저가 되려면 SKY의 이공계를 졸업하는 게 유리하다. 김 의장은 어려운 형편이지만 재수를 해서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한  뒤 대학원까지 졸업한다. 

 

솔직히 서울대 이공계는 벤처부호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54) 이사회 의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카이스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엔씨소프트 창업자 김택진(54) 대표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한결같이 가방끈이 상당히 길다. 김범수, 이해진, 김택진 등은 서울대 공대 86학번 동기들이다. 청춘시절부터 의기투합해온 사이이다. 실력과 삶의 목표를 공유한 엘리트 간의 시너지 효과가 막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공부가 성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주장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도그마이다. 하지만 이들 창업자들의 학력을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흙수저가 재벌가문과 겨루어 이기는 길은 벤처창업 밖에 없는데, 전광석화처럼 기술이 진화하는 시대에 지식과 학습력이 뒷받침 되지 못하면 IT벤처를 성공시키기 어렵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최대 승부처로 꼽히는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을 짜는 개발자의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다. 그런 개발자는 고도의 수학실력과 인문사회과학적 상상력을 겸비한 최고의 지식인이다. 어려운 조건이다. 그래서 만나기 어렵다. 희귀 인재라고 한다. 현실적으론 SKY 이공계 출신이 그나마 스펙을 충족시킨다. 

 

기자가 만난 한 벤처기업 대표는 “국내 펀딩 시장은 SKY 출신 벤처 대표들이 말아 먹는 구조”라면서 “SKY 출신이 아니라 펀딩 받기가 어렵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본인도 서울 소재 명문대학 출신임에도 이런 불평을 했다. 

 

김 의장도 창업과 성장의 과정에서 이 같은 SKY 법칙의 혜택을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본인은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SKY 법칙이 펀딩시장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은 비SKY출신이 민감하게 간파하기 마련이다. 

 

■ ‘첫 직장의 법칙’

 

둘째, ‘첫 직장의 법칙’이다. 인간은 첫 직장에서 자신의 지식과 상상력을 절반 이상 소진한다. 창업에 대한 아이디어와 열정은 첫 직장에서 싹튼다. 첫 직장에서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하면 계급론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김 의장은 삼성SDS가 첫 직장이면서 마지막 직장이다. 이해진 의장이 1992년 입사동기이다. 

 

김 의장은 그 곳에서 카카오의 모체가 되는 사업을 주도했다. ‘커뮤니케이션’이다. 지난 1996년 삼성SDS에서 PC통신 '유니텔'을 기획·개발했다. 출시 3년 만에 가입자 100만명을 모았다. 당시 업계 1위였던 천리안을 턱밑까지 따라붙었다. 

 

김 의장은 “사람이 모이면 돈이 모인다”는 철학 아래 카카오를 창업했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무료로 제공한 것이다. 한게임으로 번 돈을 거의 소진할 정도로 초반에는 고전했지만 결국 거대한 시장을 열어 가고 있다. 

 

유니텔은 PC기반의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였고, 카카오는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이다. 김 의장이 삼성SDS에서 유니텔이라는 커뮤니케이션 사업을 주도하지 않았다면 ‘카카오 비전’은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가정은 이해진 의장의 사례를 통해 강화된다. 이 의장은 1995년 삼성SDS 검색엔진팀에서 유니텔 신문기사 통합 검색엔진 개발을 담당했다. 거기서 검색시장의 가능성에 눈을 뜬 것이다.  

 

그는 1997년 삼성그룹 최초의 사내벤처 '네이버'를 공식 출범시켰고, 대성공을 거뒀다. 오늘날 네이버 신화의 원동력은 ‘검색시장’을 선점한 데 있다. 이 의장이 신문기사 검색엔진 개발을 담당하지 않았다면 네이버 창업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삼성SDS가 당시 이처럼 실험적인 사업들을 젊은 인재들에게 맡겼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의장이 검색엔진팀을 주도할 당시 나이는 20대 후반에 불과했다. 입사 3년차였다.

 

김 의장이 유니텔 PC통신사업을 기획부터 개발까지 맡았던 것은 그로부터 1년후였다. 

 

이처럼 젊은 천재들이 자유롭게 뛰어놀면서 신사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경영철학 덕분이다. 천재의 힘을 신뢰했던 인물이다. 한 명의 천재가 수십만 명을 먹여살린다고 믿었다. 그 믿음을 실천에 옮겼다. 덕분에 김 의장과 이 의장은 카카오와 네이버의 모체라고 부를 만한 사업을 수행하는 경험을 쌓았다. 부장님을 대신해서 보고서를 쓰는 일만 했다면, 카카오와 네이버는 탄생하지 못했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건희 회장이 키운 인재가 아들인 이 부회장보다 더 큰 부자가 된 것은 역설적이지만, 이건희 회장 스스로가 원했던 미래일 수도 있다.

 

■ ‘몰입적 유희의 법칙’

 

셋째, ‘몰입적 유희의 법칙’이다. 감성적이고 친화력이 강한 승부사로 알려진 김범수 의장은 ‘놀기의 달인’이다. 놀기에 몰입하는 스타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놀기의 끝은 ‘창조’였다.

 

창조의 원동력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일상적 업무에 함몰되면 작동하지 않는다. 유희의 부산물이 상상력이다. 놀아야 창조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성과가 미약해서 티가 잘 나지 않을 따름이다. 

 

김 의장의 경우는 이러한 상상력의 법칙이 화끈하게 작동된다. 그는 힘들게 재수를 해서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한 뒤 고스톱, 포커, 당구 등에 빠져서 진탕 놀았다고 한다. 1980년대 대학가의 일반적 풍경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김 의장은 좀 지나친 경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경험은 훗날 큰 돈벌이의 원동력이 된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PC방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온라인 게임 열풍이 불었다. 외환위기로 구조조정 당한 실업자들이 갈 곳이 없어서 PC방에 몰린 것도 호황의 배경으로 꼽힌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가 리니지를 출시, 대박을 쳤다는 사실이다. 

 

김 대표에 비하면 김 의장은 상대적으로 소박하게 출발했다. 한양대 앞에 ‘미션넘버원’이라는 대형 PC방을 부업으로 열었다. 김 의장의 PC방도 돈을 쓸어 담았다. 자신감을 얻은 김 의장은 1998년 9월 삼성SDS를 퇴사해 강남구 삼성동에서 ‘한게임’을 창업했다.

 

한게임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직장인들 사이에서 PC포커나 고스톱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한게임으로 벌어들인 ‘큰 돈’은 네이버의 돈줄이 됐고, 네이버가 성공함에 따라 돌려받은 ‘더 큰 돈’은 카카오의 지루했던 성장과정을 지켜내는 힘이 됐다.

 

김 의장이 서울대 공대생 시절에 포커와 고스톱에 미치지 않았다면 한게임은 탄생하지 못했고, 카카오는 자금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카카오를 창업하기 전에 김 의장이 집중적으로 놀기에 빠졌던 것도 '이색적인 개인사'이다. 한게임으로 떼돈을 벌어들인 젊은 사업가가 재충전하는 과정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하다. 한 마디로 '몰입적 유희'였다. 꼬박 3년을 놀고, 그 중 1년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PC방에서 게임을 했다고 한다.

 

김 의장은 2000년에 한게임을 이해진의 네이버와 합병시켜서 만든 NHN의 공동대표를 맡는다. 2004년 NHN단독대표에 올랐고, 2007년 8월 대표직을 던지고 나와 야인이 된다. 그 이후 3년 동안 논다. 첫 1년은 가족과 함께 미국에 가서 즐긴다. 아이들을 학교에 라이딩해주면서 지낸다.

 

다음 1년은 가족을 미국에 남기고 한국에 돌아와서 혼자 논다.

 

다음 1년은 가족을 한국에 불러들여 함께 논다. 아들과 딸에게 “아빠도 재수를 했는데 1년 학교를 쉬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뭘하고 놀았을까. 게임을 못하는 딸 아이에게 게임을 가르쳐서 새벽 4시까지 온가족이 PC방에서 게임을 즐겼다는 전설같은 일화가 전해져온다. 그리고 나서 카카오를 창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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