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의 JOB채(73)] 한국전력 등 132개 공공기관 ‘노동 이사제’ 도입 초읽기, ESG경영의 새 부담 되나
이태희 입력 : 2022.01.05 13:26 ㅣ 수정 : 2022.01.05 16:39
'공공기관 운영 법률 개정안', 11일 국회 본회의서 통과 예정/ 공포 6개월 뒤 공기업 36개, 준정부기관 96개서 노동이사 선임해야
[뉴스투데이=이태희 편집인] 기업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노동조합이 근로자 대표를 이사로 참여시키는 ‘노동 이사제(근로자 이사제)’가 연초 최대 경제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국회기획재정위는 5일 오후 전체회의를 열어 ‘공공기관 노동이사’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처리한다.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이변이 없는 한 11일 열리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될 전망이다. 시행시기는 공포일로부터 6개월이다. 이에 따라 오는 7월이면 공공부문 노동이사제가 도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개정안은 공기업·준정부기관에 한해 노동자 대표 추천 또는 동의를 받은 비상임 이사를 1명 선임하도록 하는 게 골자이다. 단 임원추천위원회를 거치도록 함으로써 사측에게 최소한의 견제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021년 현재 기준 공공기관은 총 350개이다. 공기업 36개, 준정부기관 96개, 기타공공기관 218개 등이다. 이번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는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을 합치면 132개이다. 132개 공공기관에서 노동이사제가 도입되는 것이다.
재계와 노동계는 찬반양론으로 맞서고 있지만, 여야는 결국 노동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구도이다. 여야 대선후보가 나란히 공공부문 노동이사제에 대해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였던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대선정국 속에서 급류 타
공공기관 노동이사 제도는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야당과 재계의 반대로 인해 추진 동력을 얻지 못했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조차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지리멸렬했다.
하지만 대선정국 속에서 새롭게 현안으로 솟았다. 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관련법 개정안을 지난 12월 정기국회에서 처리해달라고 당부하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최근 찬성입장을 표명함에 따라 개정안 처리는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윤석열 후보는 지난 12월 15일 한국노총과 만난 자리에서 공공부문 노동이사제와 공무원과 교원 타임오프제에 대한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
이 같은 방침은 다음 날인 12월 16일 열린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 주최 윤석열 후보 초청 간담회에서도 재확인됐다. 대한상의 의장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공공부문 노동이사 도입은 민간으로 확산될 수 있어서 걱정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윤 후보는 “공공부문부터 시행해보고 판단하자”고 제안했다.
따라서 지난 4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안건조정위원회 2차 회의는 여야 합의로 개정안을 의결했다. 안건조정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의원이고, 민주당 김주영·정일영·양경숙 의원과 국민의힘 배준영·서일준 의원,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 등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지율이 심하게 흔들리는 윤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국민의힘은 전략수정을 한 셈이다.
■ 한국경총, 대한상의, 전경련 등 재계는 '경영권 침해'와 '민간부문 확산' 우려 표명
재계는 기재위 안건조정위에서 개정안이 통과된 지난 4일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단체들은 이날 공동 입장문을 발표, “그간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나 국민적 합의가 선행돼야 함을 거듭 강조했으나 이러한 요청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채 법안 개정 절차가 강행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동이사제 도입은 노사갈등이 극심한 한국적 상황 속에서 노사관계 힘의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공공기관의 방만한 운영을 조장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도 5일 입장문을 통해 “노동이사제는 노조 쪽으로 기운 운동장을 더 심각하게 기울게 할 뿐 아니라 오랜 숙원이었던 공공기관의 개혁을 저지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강성 노조가 공공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이사제가 도입되면 공공의 이익은 노조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뒷전으로 밀릴 것이 자명하다”면서 “관련 입법 절차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아가 재계는 노동이사제가 민간부문으로 확산될 경우 경영권 침해, 근로자 이익의 과도한 대변, 노사이견으로 인한 이사회의 의사결정 지연, 주주이익 침해 등의 부작용이 초래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반면에 노동계는 지배구조(Governance.거버넌스)의 혁신이 이뤄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노사 상생경영, 경영투명성 제고 등의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는 것이다.
■ '제한적 노동이사제' 도입한 독일 등 유럽국가에도 '부작용 논란' / '불확실성' 속에 던져진 132개 공기업 및 준정부기관
재계는 공공부문 노동이사제가 민간부문으로 확산될 경우 ESG경영의 핵심 이슈로 비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ESG는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의미한다. 이는 글로벌 경영 및 투자의 화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노동이사제는 ESG중 지배구조(Governance) 변화에 해당된다.
국내 대기업들은 주로 E와 S에 초점을 맞춘 ESG경영을 강화해왔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을 계기로 노동이사제가 민간부문 이슈로 전선을 확장할 경우, 상당한 경영부담을 안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유럽의 선진국들은 이미 수십년 전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했고, 현재는 그 부작용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유럽에서는 노동이사제를 시행중인 국가는 19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1년 독일을 시작으로 프랑스, 스웨덴 등이 도입했다.
독일 모델은 한국이 벤치마킹할 사례이다. 500명 이상 근로자가 근무하는 사업장이라면 공공과 민간을 불문하고 모두 노동 이사를 두도록 했다. 단 이사회를 집행기구인 경영이사회와 견제장치인 감독이사회로 분리하고, 노동 이사는 감독이사회에만 참여한다.
이사회가 ’거수기‘로 전락하는 상황을 방지하는 역할만을 노동 이사가 수행하는 셈이다. ’제한적 노동이사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이사제가 독일 경제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독일 재계도 노동이사 폐지론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와 여야 정당이 노동이사제를 도입한 유럽각국의 사례 연구를 통해 경제적 효과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채 대선정국의 격랑에 밀려 정치적 결정을 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노동이사제 도입의 효과는 불확실성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이다.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게 될 한전 등 132개 공기업 및 준정부기관은 당장 ESG 경영차원에서 새로운 부담을 안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