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조국 전 법무장관의 딸이 대학에 제출한 서류가 위조 및 허위라는 법원 판결에 따라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이 취소되는 소동이 있었던 부산대는 1946년 9월 부산 남구 대연동에서 단과대학으로 개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부산수산대와 결별 이후 충무동 등을 전전하다 정착한 부산시 서구 대신동 산자락 판잣집 교사에 인문학부가, 대연동에 수산학부와 대학 예과로 나뉘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1950년 6·25남침전쟁이 터지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기타 대학과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에 편제되었고, 휴전 이후 부산역 대화재가 발생하기 직전인 1953년 9월에 부산대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당시 윤인구(1903~1986) 부산대 초대총장은 종합대학에 걸맞은 캠퍼스 부지를 구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한편 부산역 대화재의 참사로 발생한 피해 복구와 총체적인 재건을 위한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1954년 6월8일 서구 대신동 부산대의 판잣집 건물로 잘생긴 벽안의 미군 장성이 들어섰다.
윤인구(1903~1986) 부산대 초대총장의 초청을 받고 온 위트컴(1894~1982) 미2군수사령관이었다. 반갑게 위트컴 장군을 맞은 윤 총장은 집무실에 붙여놓은 그림 한 점을 보여주며 말했다.
"장군, 내 그림을 사주시오"라는 윤 총장의 요구에 위트컴 장군은 "무슨 그림이요?"라고 반문했다.
이에 윤인구 부산대 초대총장은 "이 땅의 꿈과 교육 비전이 담긴 그림이오"라는 답과 함께 흥정하는 눈빛과 잘생긴 얼굴이라는 느낌마저 압도하는 강렬하고 찌를 듯, 파고들 듯한 열정으로 위트컴 장군을 간절히 응시했다.
위트컴 장군은 잠시 고민하다가 윤 총장의 “부산대의 미래에 투자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꿈의 내용에 주목했고, 도시 재건 차원에서 통 크게 수용하며 "하하. 그거 흥미롭군요. 좋소. 내가 그 그림을 사겠소!"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윤 총장이 제시한 그림은 부산대 장전 캠퍼스 배치도였다. 대학 문을 열었으나 캠퍼스 부지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그는 위트컴 장군의 통큰 수락에 감격했다. 바로 인류사에 남을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 거래되는 순간이었다.
■ 이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는 날 진리가 세계 끝까지 울려 퍼질거야...
위트컴 장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윤인구 총장의 '그림'은 지금 봐도 신통방통하다. '부산대 동래캠퍼스 평면도'라는 제목을 단 그림은 종 모양으로 설계돼 있다.
종 속에는 종의 추가 움직이는 형태로 대학 본관(현 인문관)과 무지개 문, 대학극장, 도서관, 운동장 등이 짜임새있게 배치돼 있다. 상단에는 종 전체가 흔들릴 수 있게 고리를 달아 놓았다.
캠퍼스 그림을 그리면서 윤 총장은 동료에게 "이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는 날 진리가 세계 끝까지 울려 퍼질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 총장은 위트컴 장군을 초청하기 전부터 그림(캠퍼스 배치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참고한 그림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1929년 제작한 '캠퍼스 라이프 안내' 팸플릿이었다. 청년 윤인구는 1929~ 1930년 프린스턴 대학의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며 그곳의 캠퍼스 분위기와 건물 배치 등을 눈여겨 봐두고 있었다.
목회자가 되고자 했던 청년 윤인구의 교육에 대한 신념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그가 경상남도 학무과장이 되면서 싹이 텄다. 그해 12월 윤인구는 부산대학 창립안을 만들었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을 하나 하나 처리해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