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부회장 얽어맨 '뫼비우스의 띠'를 끊자
[뉴스투데이=김민구 산업부장] 최근 삼성전자를 둘러싼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한동안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GOS(게임최적화시스템) 논란이 소비자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삼성전자가 움켜쥐어온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맹주 자리가 중국 샤오미 등 후발업체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있다.
또한 삼성전자는 1969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노조 파업의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
어디 이것뿐이겠나. 삼성전자가 메모리에 이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세계 최정상 정복을 선언한 ‘반도체 비전 2030’은 자칫 빛바랜 구호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다.
특히 GOS 논란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해온 삼성전자가 작은 실수를 방치해 큰 손실로 이어지는 이른바 ‘깨진 유리창 이론(The Broken Window theory)’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깨진 유리창은 그냥 지나치면 전체 위기로 번지는 휘발성이 강하다.
GOS, 스마트폰, 노조 파업, 파운드리 등 삼성전자를 위협하는 4각 파도가 휘몰아치고 있지만 격랑속에서 삼성전자호(號)를 진두지휘할 총수는 조타기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신세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8월 가석방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형기는 오는 7월에야 끝난다. 그렇다고 이 부회장이 7월 이후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형기가 끝나도 향후 5년 동안 경영 제한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수백만 명에 이르는 직원을 두고 명실상부한 초일류 글로벌 기업을 이끄는 이 부회장이 해외 출장마저 가지 못한다면 코미디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부회장은 어떻게 보면 국내 사법 체계의 대표적인 ‘희생물’이다.
그가 감옥을 두 번이나 간 것은 ‘이미 처리된 사건을 두 번 재판할 수 없다’는 일사부재리(Double Jeopardy) 원칙을 깬 초법적 형태가 아닐 수 없다. 부관참시가 따로 없다.
형법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묵시적 청탁’이라는 용어로 이 부회장에게 선고를 내렸던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법원이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 싫어 법적 논증에 눈을 감고 ‘군중에 호소하는 오류(fallacy of argumentum ad populum)’에 빠졌다는 지적은 지금도 쏟아져 나온다.
이 부회장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없는데 법원이 5년 형량을 내렸던 것은 법정증거주의(法定證據主義)에도 정면 위배된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고 규정한 헌법 103조가 무색할 정도다.
막스 베버의 ‘합리성의 강철 새장(Iron cage of rationality)’처럼 한국 사법부는 합리성을 좁은 강철 새장에 가뒀다. 합리성이 마음껏 날아다니지 못하면 그 사회와 법 체계는 발전이 아닌 어두운 동굴 속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전 세계 민주주의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라면 거대기업 총수가 한국처럼 수년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미국은 검찰이 총수를 상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면 발급은 해주지만 총수가 보석금을 내고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되기 때문이다.
‘가정법’이지만 만약 이 부회장이 수년 간 수감생활을 하지 않고 보석금을 낸 후 며칠 후 집에 돌아갔다면 고장 난 레코드판을 틀어 놓은 듯 되풀이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비난이 들불처럼 번졌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 아니겠는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부회장이 가석방으로 나왔으니 그 정도면 된 것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미안한 얘기지만 가석방은 큰 의미가 없다. 가석방은 ‘재범 가능성이 낮은 모범수형자’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결국 이 부회장은 지난해 이후 현재는 물론 형 집행 종료 후 5년 후까지 삼성전자 공식 업무에 복귀할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이것이 사면과 가석방의 차이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이 부회장을 둘러싼 경영권 승계 논란,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재판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삼성웰스토리 고발 건은 물론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을 비롯해 공정거래법 등이 삼성지배구조를 위협하고 있다. 임기가 끝나가는 현 정권이 총출동해 삼성에 대한 전방위 옥죄기를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전 세계 무대에서 촌음을 다투며 치열한 경쟁을 펼쳐도 모자랄 판에 이 부회장은 재판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정부가 기업에 대한 각종 인허가, 세무조사,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등 서슬 퍼런 칼자루를 휘두르는 데 이에 맞서 싸울 기업이 과연 있겠는가.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기는 기적은 한국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글로벌 초격차 경쟁에서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삼성전자가 당장 필요한 네덜란드 ASML 등 반도체 핵심장비 업체들은 최고경영자가 아니면 교섭에 제대로 응해주지도 않는다. 최근 미국 AT&T 등 통신업체의 5세대 이동통신(5G) 장비 수주전에서 삼성전자가 고배를 마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미국 반도체 업체 인텔과 대만 반도체 기업 TSMC가 미국, 유럽과 일본 등 세계 각지에 천문학적 돈을 쏟아 생산시설을 확충하고 글로벌 기업 인수합병(M&A)에 나서면서 삼성전자에 대한 압박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사법 리스크에 휘둘리며 좀처럼 글로벌 경영행보에 나서지 못하는 절름발이가 됐다.
삼성전자가 '뉴 삼성'이라는 야심 찬 청사진을 내놨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한 오너의 결단과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결국 이 부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한 미래 투자 또한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일본 반도체 업계가 문득 떠오른다. 일본도 한때는 삼성전자가 부러워할 정도로 세계 최고의 반도체 강국이었다. 일본은 1987년 전 세계 반도체 10대 기업 가운데 니혼전기주식회사(NEC)·도시바·히타치(1~3위)·후지쓰·(6위)·미츠비시(9위) 등 일본 기업 5곳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쥐락펴락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일본은 글로벌 가전 시장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결국 1993년 세계 반도체시장 점유율 1위를 미국에 빼앗겼고 1992년 삼성전자에 D램 분야 1위를 내주는 치욕을 맛봤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위기 상황에 맞서 싸울만한 기업 오너가 없어 변혁의 돌풍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에 비해 삼성전자는 2005~2007년 인텔보다 2000억엔 많은 8210억엔(약 8조 2000억원)을 투자해 D램 분야에서 세계 최강자로 우뚝 섰다. 같은 기간 도시바는 3250억엔, 소니는 1467억엔 투자하는 데 그쳤다. 반도체 산업은 투자액 등 ‘규모의 경제’가 지배하는 대표적인 업종이다. 일본이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과 미국에 밀리는 신세가 된 것은 투자와 오너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나마 삼성전자가 오너경영 체제를 갖춰 치킨게임이 펼쳐지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은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일본처럼 쇠락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지층 반대를 무릅쓰고 이 부회장에게 가석방 결단을 내린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음달 취임하는 윤석열 정부가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 등 통 큰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됐다.
그나마 차기 정부가 반도체 시장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내 반도체 경쟁력을 한층 끌어올리겠다는 국가 비전을 발표한 것은 박수칠만한 대목이다.
‘졸면 죽는다’는 정보통신기술(ICT) 시장의 격언처럼 글로벌 경쟁에서 한순간 방심하면 끝이다. 오너의 야심찬 투자와 글로벌 경영, 소비자를 매료시키는 혁신이 없으면 도태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국경제의 대표적인 효자 업종인 반도체 산업이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유지해야 국가 경제 발전과 대규모 고용창출이 이어진다. 한국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이상한 ‘갈라파고스 규제’와 사법 리스크, 반(反)기업 정서는 국가 경제를 나락으로 내모는 자살행위다.
이 부회장이 위기에 빠진 국내 반도체 산업을 다시 진두지휘할 수 있도록 사면 등 필요한 모든 조치가 시급하다. 그를 얽어맨 잔인한 뫼비우스의 띠를 이제 끊을 때가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