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위기관리] 전후 위기극복의 숨은 공로자 벽안의 한국인⑩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2.04.26 08:49 ㅣ 수정 : 2022.04.26 09:32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한국 육군의 아버지’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미재단’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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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건과 부흥을 위해 미국에서 한국을 돕는 공공과 민간의 끊임없는 지원과 원조를 했던 ‘한미재단’을 설립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미8군 사령관(1951년 4월~1953년 1월) 겸 유엔군 사령관이던 ‘한국 육군의 아버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 및 위트컴 장군 [사진=김희철]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부산 주재 미 군수사령관으로 1953년부터 1954년 12월까지 한국군과 부산 재건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를 위해 스스로 미육군한국지원프로그램(AFAK)을 만들어 부산대 등 교육시설,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등 각종 의료시설, 고아원 건립, 양정과 청학동 주택단지 건립, 도로 교량 건설, 부산역전 대화재 이재민 구호를 포함한 수많은 인도적 사업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의료시설 재원이 부족해지자 위트컴 장군은 자선 바자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직접 한복을 입고 홍보 행렬에 참여했고 예하 부대별로 고아원 등 후생시설에 자매결연으로 후원과 기부를 유도했다. 

 

대구에 있는 5군수지원사령관을 역임한 박주홍(육사42기) 장군은 “위트컴 장군은 당시 한국 기업의 어려움을 정성을 다해 본국에 알렸고, 이는 전후 복구와 우리 기업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고 증언했다.

 

이어 “테일러 미8군 사령관도 위트컴 장군에게 ‘귀하가 요청한 한국 재건에 필요한 자재와 장비가 곧 부산에 도착한다’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를 통해 그가 헌신적으로 전후 복구에 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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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수사령관 임기를 마친 위트컴 장군은 1954년 말 전역과 함께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위트컴 장군의 모습. [사진=박주홍]​

 

전쟁고아의 아버지라 불린 위트컴 장군

 

1954년 퇴역한 후에도 한국에 남은 위트컴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을 맡아 한미 외교라인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미8군 사령관(1951년 4월~1953년 1월) 겸 유엔군 사령관이던 ‘한국 육군의 아버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미재단’을 설립해 미국에서 한국을 돕는 공공과 민간의 지원이 끊임없이 이뤄지게 함으로써 한국 재건과 부흥 원조에 나섰다. 

 

특히 5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위트컴 장군은 그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보육원과 고아원을 짓는 등 전쟁고아 지원에 온 힘을 다했다.  

 

그가 만든 미육군한국지원프로그램(AFAK)에서도 고아원 지원 사업에 역점을 두고 군부대가 53개의 고아원을 직접 지원하도록 추진했으며, 기술을 가르치고 취직까지도 연결해 주었다.

 

‘푸른 눈의 한국인’으로 뿌리내린 위트컴 장군은 1982년 서울 용산 미8군 기지에서 심장마비로 운명하자 그 스스로가 원한 대로 ‘제2의 고향’인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그의 졸기(卒記)를 실은 ‘부산일보’ 1982년 7월23일자 기사 제목도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 부산 UN 묘지에…’였다.

 

부산 시민들도 위트컴 장군을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기억한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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