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묘숙 여사가 민간 차원에서 특히 여성의 신분으로 이러한 유해발굴 사업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고, 이로 인해 한때는 이중간첩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유골을 찾으러 왔다고 할 수 없어 중국 대리상을 통해 도그택(군번줄)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군번줄을 가져오면 하나에 500달러, 혹은 1,000달러를 주었는데 큰 돈이 계속 투입되었다.
또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유골도 사 모아 보았지만, 대부분이 짐승들의 뼈였다. 어떤 때에는 북한이 정치적 흥정을 붙이기도 했던 와중에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5년 이후에 숫제 문을 닫아버려 북한 방문이 더 어려워졌다.
한 여사가 유해발굴 사업을 위해 중국에 머물고 있던 1982년 7월12일, 86세의 위트컴 장군이 서울 용산의 미8군 전용호텔이던 내자호텔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위트컴의 평생 숙원인 유해발굴 사업 때문에 존경하는 남편의 임종도 못 지키게 됐다.
아무튼 시간과 노력에 비해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지만 위트컴의 미군 유해발굴 송환 의지와 한묘숙의 헌신적 노력은 그 이후 한·미 국책사업으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중국에 오래 있다 보니 그녀를 찾는 한국 사람도 많이 생겼다.
1980년대 후반 한 여사는 주중 한국대사관과 ‘비슷한’ 역할을 했는데, 김영삼(YS)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방중(訪中) 요청 친서를 직접 공산당 간부에게 전달했고, 대기업 인사들과 중국 고위층을 연결해주기도 했다.
■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위트컴과 한묘숙의 北·中에서 30년 삶은 한편의 대하드라마
한 여사가 묵는 호텔에는 중국이나 북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과 중국 고위층,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자주 찾았다. 이즈음 한 여사는 허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연이 닿았다.
1990년 6월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도 허담의 초청장이 있어 가능했다. 중국에 들어간 지 11년 만이었다. 1990년대 초 북한을 드나들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지도원과 운전수, 참사가 따라붙었는데 선물과 칭찬으로 먼저 호감을 산 뒤 친해지면 북한 외국인 묘지와 장진호에 대해 물어보는 식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한 여사는 1999년까지 스물다섯 번 방북했지만, 방북 초청장은 수도 없이 받았다고 했다.
북한에 들어갈 때는 선물로 옷이나 의약품, 일본약 구심(求心·심장약)을 몇 상자씩 준비했는데, 이를 위해 들어간 경비만 약 백만 달러의 많은 돈이었고 부부의 사재와 위트컴의 연금이 총동원되었다.
한 여사는 서울 집을 팔고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썼다. 위트컴 장군의 연금도 대부분 미군 유해 정보수집에 쏟아부었다. 위트컴 장군 부부의 희생과 봉사는 그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애국심과 인류애의 거룩한 표상이다.
생전 한 여사는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창고를 만들어 유해를 쌓아두고 있는데, 유해가 누구 건지 모른다. 미군 유해를 미국과 협상카드로 생각하니 유해만 모아 쌓아 놓은 거다”라며
“나는 유해 발굴에 협조하는 역할을 했고, 유해가 발견되면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사무국(DPMO, 2015년 국방부 직할청 DPAA로 격상)’이 사망·실종자 명단과 맞춰본 뒤 친인척 유전자 감식을 통해 진위를 밝힌다”고 말한 바 있다.
공식적인 미군 유해 송환은 1954년 유엔 측이 북한으로부터 유해 4011구(국군 유해 2144구, 나머지는 유엔 참전군 유해)를 돌려받은 이후 잠정 중단됐다.
90년대 초 북한은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며 보상금을 요구했는데, 96년부터는 북한에 인력과 장비를 보내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여 220여 구의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2005년 북핵 문제로 북·미 관계가 악화되자 안전 문제 때문에 미군 유해를 발굴 작업은 중단됐다. 그리고 한묘숙 여사는 위트컴 사후"위트컴 장군 희망재단"을 설립하여 고인의 숙원사업을 30년 넘게 지속했다.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미군 유해를 찾아 중국 및 북한을 떠돈 한 여사는 2017년 1월1일 90세의 생을 마감하며 그리운 남편 곁으로 떠났다.
그해 1월4일 그녀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의 존경하며 사랑하는 남편 위트컴 장군 묘역에 함께 안장됐다. 유럽 전선과 한반도 전장을 넘나들며 승리의 발판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애국심과 인류애의 표상이 된 남편은 자신의 평생 숙원을 실천한 아내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위트컴 장군은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유일한 유엔군(미군) 장성이며 한묘숙은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남편 위트컴 장군의 유지를 구현하기 위해 30여 년을 중국과 북한에서 떠돈 아내의 일생은 한 편의 대하(大河)드라마 같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