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부회장, '팹리스' 육성에 팔 걷어붙인 사연은
[뉴스투데이=전소영 기자]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라는 명성 뒤에도 쓰린 속 사정이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 세계 1위에 올라섰지만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는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하지 못하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 산업에서 위용을 자랑하려면 '팹리스(Fabless·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하지만 팹리스 산업은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드는데다 안정적인 판로 확보도 쉽지 않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한국 팹리스는 기술 발전은 커녕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주축인 파운드리(foundry·반도체 위탁생산)기업과 팹리스 기업 간 상생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영세한 국내 중소 팹리스 기업을 키우기 위해 중소벤처기업부와 삼성전자가 손을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이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분위기다.
■ ‘반도체 왕’ 한국의 아픈 손가락 ‘팹리스’
한국이 전 세계 반도체 시장 강국이라는 점은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프다’할 만큼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해 국내 대표 기업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서만 760억달러(약 90조3800억원)에 이르는 매출을 달성하며 미국 반도체 업체 인텔을 3년 만에 꺾고 세계 반도체 기업 매출 1위를 탈환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가 공개한 ‘2021년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 톱(Top)10’ 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 반도체 매출은 전년 대비 31.6% 증가했으며 매출 기준 시장점유율은 전년 대비 0.5% 포인트 오른 13%로 집계됐다.
이 같은 성장 배경으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재택근무, 원격수업, 주요 클라우드 업체의 서버 증축 확대로 메모리 수요가 급증한 점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다.
대표적인 메모리 반도체 D램을 기준으로 올해 1분기 세계 시장의 70.8%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D램 제조업체들이 점유했다고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밝혔다. 이는 지난해 4분기(72.0%) 대비 1% 가량 소폭 감소하긴 했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팹리스 기업들은 우울한 성적표를 거머쥐고 있다.
팹리스는 'Fabrication(직접생산)+less'의 합성어로 반도체 제품을 직접 생산하지 않고 반도체 설계를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를 일컫는다.
한국의 팹리스 생태계는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에 따르면 전 세계 팹리스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1.5% 수준에 그친다. 이 시장의 핵심 축인 미국(56.8%), 대만(20.7%)과 비교조차 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국내 팹리스 기업의 대표격인 LX세미콘(옛 실리콘웍스)이 지난해 3분기 기준 세계 시장점유율 13위를 달성해 10위권대에 들어섰지만 국내 팹리스 기업 전반을 평가한다면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김용석 반도체공학회 부회장은 “국내 팹리스 기업은 대부분 10∼20명 정도로 구성된 영세사업자로 이뤄져 성공한 사례가 많지 않다”며 “대기업처럼 기술개발이나 투자가 어려워 전 세계 시장에서 1%대 수준에 머물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전 세계 상위 10개 팹리스의 매출액은 총 1274억달러(약 155조원)로 전년 대비 48% 증가했다. 이는 전체 반도체 시장 가운데 증가율이 가장 높은 편이다. 이에 따라 한국이 반도체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하려면 팹리스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 한국 팹리스 기업 육성 위해 파운드리 기업과의 협력 절실
한국 팹리스 위기는 이미 업계에서도 인지하고 있는 문제다.
그동안 국내 팹리스 기업은 파운드리 수급 불균형으로 신제품 검증과 반도체 칩 양산에 어려움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국내 파운드리 기업과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도 쏟아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11월 중소벤처기업부가 개최한 ‘파운드리 기업과의 토론회’에 참석한 삼성전자, DB하이텍,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파운드리 관계자들은 “국내 팹리스 육성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며 중소 팹리스 기업과의 협력 방안을 적극 발굴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중기부를 이끌던 권칠승 장관도 “우리는 대기업과 중견기업 중소기업이 힘을 모아 혁신적인 성과와 어려움을 헤쳐 나간 소중한 경험을 했다”며 “지금은 이런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협력 성과를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도 확산하는 상생의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조성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중기부는 당시 토론회에서 나온 의견을 기반으로 ‘중소 팹리스의 3대 애로사항 해소방안’을 마련했다.
우선 ‘공동 설계자산(IP) 플랫폼’ 구축이다. 설계자산(IP) 개발과 해외설계자산(IP)를 제공하고 현장 수요에 기반한 설계인력을 양성한다는 취지다. 이를 토대로 중기부는 오는 2030년까지 국내 팹리스 기업이 지금보다 2배(300개)가량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생산애로를 해소하기 위해 ‘대중소 상생협의체’ 구축이 절실하다. 정기적으로 팹리스의 연간 시제품 위탁 수요를 조사해 파운드리 공정에 반영하고 중소 팹리스와 파운드리와의 협력과제를 발굴해 상시 소통·협력채널로 활용하겠다는 얘기다.
대기업에 필요한 기술·제품·서비스 등을 보유한 중소 팹리스 기업을 개발 단계부터 참여시켜 선정된 중소 팹리스 기업에 사업화 자금과 테스트베드 및 멘토링을 제공하는 ‘대-스타 해결사 플랫폼’ 등 기업 간 협력 지원으로 중소 팹리스의 공동 사업화도 해법 가운데 하나다.
이처럼 파운드리 기업과의 협력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최근 정부와 삼성전자가 중소 팹리스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업계에 따르면 이영 중기부 장관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25일 열린 ‘2022 대한민국 중소기업인 대회’에서 만나 국내 팹리스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 중소 팹리스 챌린지 대회’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일각에서는 한국 팹리스 기업은 퀄컴·엔비디아·브로드컴·미디어텍·AMD 등 세계적인 팹리스 기업들을 따라가긴 역부족이지만 4차 산업혁명을 변곡점으로 삼아 충분히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김용석 부회장은 “4차 산업혁명은 기술의 변곡점으로 스마트폰이나 인공지능(AI) 분야에서 지금 제품들보다 응용된 제품이 생겨나고 여기에 들어가는 칩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며 "처음에는 이들 물량이 크지 않겠지만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그는 또 “새로운 기술이 나오는 이 시점이 팹리스 기업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며 “미디어텍은 4세대 이동통신(4G)에서 5G로 넘어갈 때 (새로운 AP(스마트폰용 프로세서)) 개발에 성공하면서 퀄컴을 꺾고 승기를 잡았다”며 “새롭게 생겨날 시장을 먼저 공략해나가야 앞으로 한국 팹리스 기업들이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