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열쇠부대 유명세에 가려진 그늘은 과유불급 탓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투위주의 강인한 교육훈련이 강조되었던 당시에는 군사령부 통제로 매년 사단기동훈련을 했다.
그때 다음번 기동훈련이 계획된 인접 타사단에서 사단장을 포함한 참모요원들이 파견되어 관찰 및 평가 지원을 통해 자신 부대의 기동훈련시 참고하는 바람직하고 좋은 시스템도 있었다.
마침 필자가 소속된 무적태풍부대가 열쇠부대의 기동훈련의 관찰 및 평가지원 임무를 부여 받았다.
무적태풍부대 이재관 사단장의 2년 후배인 열쇠부대 사단장 김석재 장군(육사23기)은 1944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안의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제23기로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김 장군은 육사 화랑대의 훈육관.연대장.생도대장을 거친 독특한 생도배출 업무경력 때문인지 온화한 성품에 상하간 격의없는 대화를 중시하는 지휘철학을 갖고 있어 부하들 신망이 두터웠다. 또한 육척장신에 외모도 서글서글했다.
허나 일선부대 요직을 두루 거친 야전통으로 서글서글한 외모와 달리 일처리가 빈틈이 없다는 평을 받으며 너무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려 해 주변에 부담을 준다는 얘기도 있었다.
참고로 김석재 장군은 5사단장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탁월한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아 육본인사참모부장, 3군단장, 1군사령관직을 끝으로 전역한 후 2002년 7월11일 개각시 비상기획위원장을 역임했다.
■ 6.25남침전쟁전에 창설된 열쇠부대는 ‘피의 능선 전투’와 ‘가칠봉 전투’로 유명
상징 명칭이 ‘열쇠부대’로 불리는 5사단은 1948년 4월29일 경기도 수색에서 3, 4, 9연대를 기반으로 5여단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후 여단 주둔지가 전라남도 광주로 변경되었고, 1949년 5월12일, 5보병사단으로 승격했다.
이때 15, 20연대가 사단으로 배속되었다. 초대 사단장은 송호성 준장. 이후 1949년 7월에는 백선엽 대령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사단은 15연대를 전주에, 20연대를 광주에 주둔시켜 빨치산 토벌을 주 임무로 하며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였고,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후 1950년 6.25남침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의 소환으로 서울 용산에 올라와 북한군 남하 지연작전에 참여하였다. 이 시점에는 백선엽이 1사단으로 옮겨가고 이응준(군영1기) 준장이 사단장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말이 지연전이지, 닥치는 대로 투입하라는 채병덕 총장의 삽질 작전지시로 말미암아 예하 부대들은 사단장조차 모르는 사이 많은 병력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와중에 2개 대대로 부대 건제를 유지했던 15연대는 1개 대대만 남은 1사단 13연대 재건을 위해 해체되고, 20연대 역시 창동 - 미아리 축선 방어전을 위해 한강 이북에 투입되었다가 전멸하여 지휘 가능한 연대들이 사실상 없어졌다.
그래도 남은 병력들을 긁어모아 7월1일부터 시흥전투지구사령부 예하부대로서 지연전을 전개하며 철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나마 있던 병력들까지 분산되어 17일에는 기어이 사단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후 1950년 10월8일 대구에 주둔 중이던 27연대, 마산에 주둔 중인 35연대, 부산에 주둔 중인 36연대를 근간으로 대구에서 5보병사단을 재창설하였고, 이 연대들이 지금까지 이르게 됐다.
다시 재창설된 5사단은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루었는데, 그 중 36연대가 미 2사단 예속으로 치룬 ‘피의 능선 전투’와 ‘가칠봉 전투’가 유명하다.
■ 명성 높은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낙후된 시설을 만들게 된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
역대 5사단장은 쟁쟁한 장군들 즉 대통령,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등 역사적인 인물이 많았다.
창설 초기에 원용덕, 백선엽, 이응준과 16대 박정희(육사2기) 장군을 비롯해 채명신(육사5기), 강창성, 윤성민(육사8기), 정병주(육사9기), 김복동(육사11기), 정호근(갑종5기), 신말업(육사16기) 등이 사단장을 역임했고, 사단기동훈련 당시에는 37대 김석재(육사23기) 장군이었다.
역시 5사단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대답게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사단기동훈련에 임했다. 이는 부대운용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단 작전보좌관 김용호 소령(육사37기)을 비롯한 참모들의 정중동(靜中動) 활약 결과물이기도 했다.
특히 김석재 장군의 정확한 상황판단과 지침을 하달하는 작전 지휘력이 돋보였고, 인접 부대 사단장이었지만 선배인 이재관 장군(육사21기)을 존경하며 환대하는 모습이 후배들 보기에도 너무 좋았다.
그러나 부대의 전통과 명성이나 사단장의 유명세와는 달리 사단사령부를 포함한 부대의 전반적인 시설은 6.25남침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 11월18일에 창설된 무적태풍부대보다도 열악했다.
그 이유는 대통령,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등 역사적인 인물인 쟁쟁한 장군들이 사단장을 역임하다보니 열악한 시설들을 중기계획 등의 정상적인 절차와 방법보다는 잘 아는 지인들의 협조로 당시에는 타부대에 없지만 필요한 시설들을 새롭게 만들고 보강했다
허나 군이 발전하고 현대식 건물 등을 정상적으로 중기계획에 반영할 때 미흡하지만 이미 설치된 건물이 있는 부대는 우선순위가 떨어지다보니 무적태풍부대보다도 당시의 열쇠부대 시설들이 오히려 노후되고 열악하게 된 결과가 되었다.
세상살이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이며 아이러니한 것이라고 한다. 타부대에 없는 것을 자력으로 설치할 당시에는 매우 흡족했으나, 결국 명성 높은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타부대보다도 낙후된 시설로 남게 된 결과라는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할까....?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