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 이슈 진단 (75)] 글로벌 방산 시장 요구 반영하려면 소요기획 과정부터 업체 참여 활성화돼야
현재 ADD 사전개념연구 때 의견 개진만 가능한데 업체 의견 듣는 공식적 창구 마련돼야
한국의 방위산업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방위사업청은 방위산업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인 제도 개선과 함께 법규 제·개정도 추진 중이다. 그럼에도 방위사업 전반에 다양한 문제들이 작용해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뉴스투데이는 제도개선 효과와 함께 이런 문제들을 심층 진단하는 [방산 이슈 진단]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김한경 안보전문기자] 폴란드에 이어 호주에 대한 대규모 방산수출 성사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호주는 현재 최대 20조원 규모의 육군 차세대 보병전투장갑차 사업을 추진 중인데, 다음 달에 우선협상대상자를 최종 선정할 예정이다. 현재 한화디펜스의 ‘레드백’이 독일 라인메탈의 ‘링스’와 함께 최종 후보에 올라 있는 상태다.
레드백은 국내에서 운용하던 K-21 장갑차를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K-21을 기반으로 호주 육군의 요구에 부합하는 차세대 장갑차를 한화디펜스가 새롭게 개발한 것이다. 즉 기존의 소요기획 절차와는 달리 업체 자체적인 소요기획을 통해 탄생한 국내 최초의 무기체계이다. 이를 계기로 소요기획 과정에 업체 참여가 활성화돼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 업체 의견 배제되는 경우 많은데다 제안할 수 있는 기회도 없어
무기체계 소요기획은 크게 소요제기-소요검토-소요결정 단계로 구성된다. 각 군이 작성한 소요제기서가 합참에 제출되면 합참은 통합개념팀(ICT) 검토를 거쳐 전력소요서를 완성한다. 이어 합참의장이 주관하는 합동참모회의에서 소요결정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절차로 인해 일부 긴급소요(1~2년)를 제외하면 소요제기부터 소요결정까지 통상 4~5년이 소요된다.
각 군은 소요제기서 작성 과정에서 무기체계의 작전요구성능(ROC)과 관련해 국방과학연구소(ADD) 관계자의 의견을 듣는다. 이를 위해 ADD는 사전개념연구를 통해 ROC 등을 선행적으로 연구하게 되며, 이때가 소요기획 과정에서 업체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하지만 군의 소요제기 범위 내에서만 의견 개진이 가능하며 그마저도 때때로 무시되거나 반영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소요기획 과정에서 업체들의 의견이 사실상 배제되는 경우가 많은데다, 업체가 먼저 제안할 수 있는 기회도 없어 군의 소요제기 내용에 포함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결국 업체는 글로벌 방산 시장에서 주목받는 제품보다 국내 수요에 한정된 제품 위주로 개발·생산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가성비 좋은 제품의 개발이나 신기술 적용의 기회를 상실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 선진국은 업체와 긴밀히 소통하나 우리는 업체 접촉 꺼리는 분위기
반면, 선진국들은 소요기획 과정부터 군과 업체 간 긴밀한 소통과 협력이 이뤄져 글로벌 경쟁력을 구비한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이 보편화돼 있다. 미국의 경우 전투사령부별로 무기체계 소요기획 시 해당 방산업체와 1:1 회의를 통해 ROC, 핵심성능지표(KPP), 글로벌 시장 진출이 가능한 경쟁력을 갖춘 제품 개발 등을 수시로 협의한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정부와 업체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전 세계 해당 제품의 수요를 심층적으로 조사·분석해 글로벌 3위 이내 시장 확보가 가능한 제품만을 개발한다. 무인기·레이다·미사일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주도하면서 생산 대비 수출 비중이 70~80%에 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 프랑스 등도 초기 단계부터 수출 가능성 검토 등을 통해 업체의 다양한 의견이 반영된 소요를 작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산 선진국들의 소요기획 방식에 비해 우리는 업체의 의견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다. 반면에 군 관계자들은 기술 분야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ADD의 의견은 최대한 존중한다. 따라서 ADD의 의도와 목적대로 소요제기서와 전력소요서가 대부분 작성된다. 이런 ADD 의존 구조가 관행화됨에 따라 글로벌 시장의 흐름을 반영하기보다 기술 중심의 개발에 집중하게 된다.
게다가 소요군 및 합참, 방위사업청에서는 과거 방산비리 감사 및 수사의 영향으로 소요기획 과정에서 업체와 직접 접촉하는 행위를 매우 꺼리는 분위기가 만연돼 있다. 실제로 소요제기서 작성 간 군이 업체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공식적인 창구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다. 업체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아도 제기할 창구가 없어 결국 활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 업체 제안 창구 마련하거나 협업 가능한 협의체 통해 협력 필요
이와 관련, 장원준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업체의 소요요청서(가칭) 제안 창구를 공식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면서 “업체가 제안한 소요요청서(가칭)를 사전개념연구(ADD), 통합개념팀(합참) 등에서 검토하고 결과를 직접 업체에 통보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내수용 제품 개발에서 글로벌 시장 지향형 제품 개발로 전환을 유도해야 한다는 얘기다.
최기일 상지대 교수도 “현행 무기체계 소개회 등을 보완·발전시켜 소요군과 합참, ADD, 업체가 함께 토의 및 협업하는 공식적인 민관소요검토협의체(가칭)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형곤 국방기술학회 정책연구센터장은 “글로벌 시장 진출이 유망한 무기체계는 업체도 소량을 보유해 수출 마케팅에 활용할 수 있게 하고, 소요기획 과정부터 민관이 협력해 수출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한화디펜스의 ‘레드백’이 호주 장갑차 사업의 최종 후보 중 하나로 선정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요기획 과정에서 업체 의견 반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입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는 세계 4대 방산수출국으로 도약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실현하려면 소요기획 과정부터 글로벌 방산 시장의 요구가 적절히 반영돼야 하며, 이에 필요한 제도 마련에 방위사업청이 앞장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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