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일류 기업 만든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 '품질혁신' 지금도 빛난다
삼성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보릿고개를 넘고 있다. 글로벌 복합 위기 상황속에서 그룹의 맏형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 실적 부진으로 1분기 어닝쇼크를 기록했으며 2분기는 적자로 돌아설 전망이 나오고 있다. 어수선한 경영환경 가운데 삼성은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7일 30주년을 맞았다. 저성장과 내수부진, 고물가 등 위기 속에서 이뤄진 신경영 선언은 삼성이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됐다. 현재 삼성의 위기는 신경영 선언 당시와 너무 닮아 있다. 뉴스투데이는 삼성의 신경영 선언 30년사(史)를 되돌아보고 위기 돌파가 절실한 삼성과 이재용 회장에 기대하는 ‘제2 신경영’ 전략 점검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뉴스투데이=전소영 기자] 이건희 선대회장은 다양한 경영 철학을 남긴 인물이다. 그 가운데 ‘신경영’은 자칫 ‘국내 1위’ 기업에 그칠 수 있었던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변곡점으로 재계에 큰 울림을 준 대표적인 경영전략으로 평가된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아버지 이병철 창업회장이 타계하며 1987년 삼성을 본격적으로 이끌게 됐다. 이듬해인 1988년에 열린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이건희 선대회장은 21세기 세계적 초일류기업 달성을 지향하는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제2의 창업의 핵심 덕목은 ‘자율경영’, ‘기술중시’, ‘인간존중’ 등 3가지로 압축했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조직의 기본 틀은 지키되 임직원이 역할과 권한을 갖고 소신껏 사업을 추진하고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선대회장은 또 기업의 국제경쟁력은 기술력에서 나온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기술을 경영 핵심으로 삼고 세계적인 기술력을 확보해야 하며 사람을 가장 값진 자원으로 여겨 임직원을 경영의 수단이 아닌 주체이며 목적으로 여기길 바랬다.
그러나 1990년대 초까지도 국내 재계는 부가가치, 시너지, 장기적 생존전략 등 질(質)적 성장보다는 당장 눈앞에 놓인 실적에만 급급한 양(量)적 성장에 치중했다. 일선 경영진은 ‘국내 제일 기업’이라는 우물에 갇혀 외형을 중요하게 여기는 오래된 관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선대회장은 일찍부터 급변하는 글로벌 경영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류 기업 반열에 올라야 하며 현재 삼성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는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실제 그 무렵 삼성 제품은 국내나 동남아 등 일부 시장에서는 성공을 거뒀지만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는 ‘싸구려’ 수준에 불과했다.
이 선대회장은 한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경영진을 향해 “우리는 자만심에 눈이 가려 위기를 진정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못난 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등허리에 식은땀이 난다”는 뼈 때리는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1993년 2월 전자 관계사 주요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LA) 전자부문 수출상품 현지비교 평가회의에서 삼성의 ‘국내 제일주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났다. 삼성이 우수하다고 자부하며 내놓은 제품들은 글로벌 최대 무대 미국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한쪽 구석에 내몰려 있었다. 심지어 일부는 제품이 깨져있거나 작동하지 않는데도 진열대를 지키고 있었다.
이 선대회장은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며 “한쪽 구석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 왜 삼성이란 이름을 쓰는가. 이는 주주, 종업원, 국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선대회장의 통탄은 같은 해 6월 일본과 독일에서도 이어졌다.
1993년 6월 4일 일본 도쿄에서 삼성 경영 현장을 지도해 온 일본인 고문들과 만난 이 선대회장은 ‘일류상품은 상품기획과 생산기술 등이 일체화 돼야 하는데 삼성은 상품기획이 약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개발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러다 보니 시장에 물건이 나오는 시점은 놓치고 있다는 게 골자였다.
그를 절치부심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벌어진다.
이 선대회장은 당시 현지 세탁기 조립 라인에서 덮개 여닫이 부분 규격이 맞지 않자 직원이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 내고 조립하는 모습이 담긴 품질고발 사내방송 프로그램 비디오테이프를 목격했다.
1993년 6월 7일 이 선대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켐핀스키 호텔에서 본사와 각국 법인장을 불러 비상경영회의를 열었고 그 자리에서 삼성 그룹 역사상 큰 변곡점이 되는 ‘신경영 선언’이 이뤄졌다.
이 선대회장은 “삼성은 이제 양 위주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며 질 경영을 위한 근본 혁신을 강조했다. 그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고 거침없이 쏟아냈다. 기업 회장으로서 다소 정제되지 않은 발언까지 서슴지 않은 그의 태도에는 그만큼 절박함이 느껴졌다.
신경영 선언 이후 2개월에 걸쳐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스위스 ‘로잔’, 영국 ‘런던’, 일본 ‘도쿄·오사카·후쿠오카’ 등에서 질적 성장을 위한 이 선대회장 회의와 특강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이후 신경영 실현을 위한 그의 의지는 조직 문제를 진단할 때 보다 더욱 냉철했으며 과감하고 결단력이 배어났다.
그는 ‘생산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고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인 집단인 무감각한 회사’라고 질타하며 임직원들 머릿속에 내재된 기본 의식부터 뿌리 뽑기 위해 노력했다.
이 선대회장은 가장 먼저 ‘많은 양을 생산하기 위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량은 고질적 병폐’로 여기고 생산라인 가동을 멈추더라도 불량을 선진국 수준으로 낮춰야 하는 이른바 ‘라인스톱 제도’를 시행했다. 한 품목을 만들더라도 세계 제일의 제품을 만들자는 게 그의 취지였다.
불량이 발생하면 즉시 생산라인 가동을 멈추고 제조과정 문제점을 해결한 후 다시 가동하는 방식이었다. 수익성을 고민해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혁신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직원 고통은 뒤따랐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삼성의 1993년 불량률은 전년 대비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라인스톱제에 이은 1995년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의지가 명확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당시 삼성전자의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신경영 선언 이후 제품 품질을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완제품 생산 추진에만 몰두해 제품 불량률이 11.8%에 이르렀다.
이에 이 선대회장은 “신경영 이후에도 이런 나쁜 물건을 만들고 엉터리 물건을 파는 정신은 무엇인가. 수준 미달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고객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 주고 이후 수거된 제품을 소각해 임직원 불량의식도 함께 불태우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당시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을 통해 폐기된 제품은 15만대에 이른다.
삼성은 “이러한 가시적 조치와 노력을 통해 ‘불량은 암’이라는 인식이 삼성인들 가슴속에 자리를 잡아갔고 현장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부실 요인을 찾아 고치는 풍토가 그룹 전체에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건희 선대회장의 냉철하고 과감한 결단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글로벌 삼성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