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래 명예회장 타계와 '포스트 효성'(上)] '섬유산업 아버지', 최첨단 기술로 한국 소재산업 세계 1등 만들어
전소영 기자 입력 : 2024.04.02 05:00 ㅣ 수정 : 2024.04.02 05:00
故 조석래 명예회장 '기술 중심주의' 통해 스판덱스·타이어코드 '세계 1위' 국내 최초 민간기업 기술연구소 '효성기술원' 설립...첨단 기술력 기지 역할 효성, 중국 등 해외에 '섬유의 반도체' 스판덱스 공장 세워 2010년 세계 1위 고성능 산업용 소재'탄소섬유' 개발해 세계 시장점유율 10% 확보 추진 한미 FTA ·미국 비자 면제 프로그램·중소기업 상생협력 등 '글로벌화 일등공신'
효성가(家) 2대 별이 저물었다. 효성그룹 2대 회장인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지난달 29일 숙환으로 영면했다. 향년 89세. 조 명예회장은 창업주인 아버지 故(고) 조홍제 회장을 이어 그룹을 35년간 이끌며 섬유, 첨단소재, 중공업, 화학, 무역, 금융정보화기기 등 사업부문에서 효성을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키운 기업인이다. 뉴스투데이는 효성, 더 나아가 한국 산업화 일등공신인 조 명예회장의 업적과 그가 떠난 후 남겨진 효성家 지분 상속 이슈와 계열분리 등 후속 절차를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를 두 차례 나눠 연재한다. [편집자주]
[뉴스투데이=전소영 기자] “세계 최고 기술과 최고 품질을 유지하도록 철저하게 관리해 나가며 연구부문에서 독자기술을 개발해 경쟁력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2001년 12월 ‘올해의 효성인상 시상식’에서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남긴 말이다. 이는 조석래 명예회장이 효성그룹 35년 경영사(史)를 쓰는 동안 삼아온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 명예회장은 경영 일선에 머무는 동안 ‘기술 중심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여겨왔다. 그는 ‘경제발전과 기업 미래는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개발력에 있다’고 강조하며 독자기술 확보에 전념했다. 이러한 그의 집념은 효성이 세계 1위를 지키는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을 탄생시켰다.
그룹 경영뿐만 아니라 한미재계협회장, 한일경제인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경제 위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해 온 그를 한국 재계는 ‘존경받던 재계 원로’라고 회상한다.
조 명예회장은 1935년생으로 아버지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의 첫째 아들이다.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등학교에서 1학년을 다닌 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 대학교 이공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이후 미국 일리노이공과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하던 중 1966년 부친 부름으로 효성물산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그룹 경영에 뛰어들었다. 그는 효성그룹 성장의 기틀이 됐다고 평가받는 ‘동양나일론 울산공장' 건설을 성공적으로 주도해 얼굴도장을 찍었다.
고 조홍제 창업주는 1966년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간산업에 투자한다는 명목으로 나일론 원사를 생산하는 동양나일론을 설립했다. 그는 최신시설을 겸비한 울산공장을 준공해 화섬업체로 입지를 다졌다.
이때 조 명예회장은 건설본부장을 맡으며 공장 운영 역량 확보에 주력했다.
동양나일론이 1970년 한일나일론을 인수 합병해 사업 영토를 확장할 시점에 그는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이듬해 조 명예회장은 국내 최초로 민간기업 기술연구소 설립을 추진했다.
이 연구소는 ‘효성기술원’의 전신으로 효성이 첨단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핵심 R&D(연구개발) 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조 명예회장은 1973년 일본 아사히카세이와 함께 동양폴리에스터를 설립해 화섬사업의 기틀을 마련했고 폴리에스터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1975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부응해 한영공업을 인수해 효성중공업으로 회사 이름을 바꾸고 중화학공업에도 진출했다.
조 명예회장은 발전기, 전동기, 변압기, 발전용 보일러 등 중전기(重電機)와 산업기계 국산화에 힘썼다.
실제 효성중공업은 △345kV 변압기 △70kV GCB(가스절연기기) △3상 고압 유도 전동기를 시작으로 △150kV 견인전동기(TM) △363kV 40kA GIS(가스절연개폐기) 등을 개발해 우리나라 산업화에 큰 공헌을 했다.
1982년 효성중공업 회장이 된 조 명예회장은 경영 전면에 나섰다. 회장 취임 후 그의 ‘기술경영’ 경영철학은 특히 섬유사업에서 더욱 빛을 내기 시작했다.
조 명예회장은 1990년 일명 ‘Q(Question·퀘스천) 프로젝트’로 불리는 스판덱스 독자 개발을 주문했다. 스판덱스는 ‘섬유의 반도체’로 불릴 만큼 섬유업계에서 높은 기술 장벽과 함께 고부가가치를 지닌 제품이다.
조 명예회장이 독자 개발을 추진할 당시 스판덱스는 미국, 일본 등 일부 선진국만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Q는 ‘어떤 제품이 탄생할 지 의문투성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는 스판덱스 독자 개발이 조 명예회장에게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 명예회장은 스판덱스 성장 가능성을 믿고 연구개발(R&D)과 투자에 매진했다. 3년간 이어진 시행착오을 거듭한 끝에 효성은 1992년 국내 최초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스판덱스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효성은 중국을 비롯해 △베트남 △터키 △브라질 △인도 등에 글로벌 스판덱스 생산기지를 세웠다. 그리고 독자 개발 20년만인 2010년 스판덱스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라는 영예를 안았다.
효성의 또 다른 주력사업 '타이어코드'와 신(新)성장 동력 '탄소섬유'도 마찬가지다.
타이어코드는 자동차 타이어의 내구성과 주행성,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고무 내부에 들어가는 섬유 재질 보강재이다.
효성은 국내 최초로 1968년 나일론 타이어코드를, 1978년 폴리에스터 타이어코드를 생산했다. 현재 이 사업을 맡고 있는 효성첨단소재는 세계 폴리에스터 타이어코드 시장점유율이 절반을 넘어 글로벌 1위를 지키고 있다.
첨단 신기술 개발을 주도하기 위해 조 명예회장은 2006년 탄소섬유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도록 주문했고 2011년 한국 기업 최초로, 전 세계에서 세번째로 탄소섬유 독자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탄소섬유는 금속(알루미늄)보다 가볍지만 금속(철)에 비해 탄성과 강도가 뛰어나다. 이에 따라 이 제품은 스포츠용품(낚싯대, 골프채, 테니스 라켓), 항공우주산업(내열재, 항공기 동체), 자동차, 토목건축(경량재, 내장재), 전기전자, 통신(안테나), 환경산업(공기정화기, 정수기) 등 각 분야의 고성능 산업용 소재로 널리 쓰인다.
첨단 기술력을 확보한 효성첨단소재는 2028년까지 총 1조원을 투자해 연산 2만4000톤 규모의 탄소섬유 생산능력을 갖춰 글로벌 탄소섬유 시장점유율 10%를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을 마련했다.
효성그룹 관계자는 “조 명예회장은 효성그룹 2대 회장으로 그룹을 35년간 이끌며 원천 기술을 기반으로 섬유, 첨단소재, 중공업, 화학, 무역, 금융정보화기기 등 효성의 모든 사업부문에서 한국을 넘어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조 명예회장은 신소재·신합섬·석유화학·중전기 등 산업 각 방면에서 신기술 개발을 선도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했다”며 “이는 효성그룹이 독자기술 기반으로 글로벌 소재 시장에서 리딩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됐다”고 강조했다.
재계의 관계자는 <뉴스투데이>와 통화에서 “조 명예회장은 효성그룹이 섬유, 소재 등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초석을 다진 기업인으로 조 명예회장의 기술 확보에 대한 열정이 지금의 효성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조현준 회장도 아버지 뜻을 이어 기술 중심 경영철학으로 그룹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 명예회장은 한국 재계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맡으며 ‘민간 외교관’을 자처했다.
그가 재계인으로서 맡은 대표적인 업적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조 명예회장은 한미 FTA 체결 필요성을 처음으로 공식 제기한 주인공이다.
한미 FTA 협상 당시 조 명예회장은 양국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양국 재계 인사, 미국 행정부·의회 유력 인사들과 연이어 만나는 등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FTA 체결 당시 미국 비자면제 프로그램 가입도 그의 공로다.
2007∼2011년 한국경제인연합회(옛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으로 활동한 그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에도 앞장섰다.
그는 역대 전경련 회장 가운데 최초로 중소기업중앙회와 ‘경제활력 회복을 위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선언문’을 공동 발표했다. 당시 그는 중소기업 경쟁력이 곧 우리나라 경쟁력이라고 평가하며 우리경제와 대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기초이자 기반인 중소기업과의 상생협력 중요성을 역설했다.
한국 재계는 ‘재계 큰 별’ 조 명예회장 영면 소식에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한경연은 “시대를 앞서가신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로 기업은 기술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원천기술 개발에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며 “스판덱스 등 첨단 섬유 원천기술 확보와 미래 산업의 쌀이라는 탄소섬유의 독자개발을 통해 ‘기술 한국’ 면모를 전 세계에 각인시킨 회장님 공로를 기억한다”고 추도사를 전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민간외교에도 앞장서며 한국경제 지평을 넓히는데 이바지했다”며 “한국경제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과 임직원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조 명예회장이 강조하신 ‘기술 중심주의’와 ‘품질경영’을 바탕으로 효성그룹은 섬유, 첨단소재, 화학, 중공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발돋움했다”며 “경영계는 고인의 기업가정신과 경영철학을 이어받아 기업 경쟁력 강화와 기술혁신을 통한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