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요안 칼럼] 계엄군 장병과 가족이 겪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관심 필요하다

정요안 정보관리전문기자 입력 : 2024.12.23 15:05 ㅣ 수정 : 2024.12.23 15:47

지시에 따라 단순히 출동했거나 현장에서 양심에 따라 행동한 장병들까지 반란군으로 비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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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 당시 국회에 투입된 제1공수여단의 이상현 준장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열린 계엄 관련 긴급 현안질의에 출석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정요안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2.3 비상계엄 사태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물론 자녀들까지 반란군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지난 10일 진행된 국회 국방위원회 현안질의에 참석했던 1공수여단 여단장(이상현 준장)은 국회의원들 앞에서 부하의 자녀가 최근 겪은 상황을 예로 들면서 눈물을 흘리며 참담한 심정을 표현했다. 

 

그는 “제 부하가 가족을 데리고 외식하러 갔다가 주민들이 ‘반란군 자식들아 꺼져라’라며 욕을 해 식사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면서 “특전사는 ‘절대복종 절대충성’의 마음으로 등에 화약을 메고 국가가 부여한 임무에 과감히 뛰어들어가 순직을 하는 그런 집단인데, 이들에게 반란군의 오명은 씌우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여·야 정치권에서도 명령에 따라 계엄사태의 일선에 배치됐던 장병들이 피해를 입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전방에 있는 군단급 부대들도 다 가담된 것으로 법적으로 볼 수 있지만, 병력이 출동한 부대로 국한하는 노력을 국방부가 해달라고 했다. 유용원 국민의 힘 의원 또한 특전사 장병을 비롯해 다수의 장병은 피해자라며 트라우마에 당분간 시달릴 가능성이 많다고 언급했다.

 

부당한 명령을 ’절대복종 절대충성‘이라는 생각으로 이행해 자신이 지켜야 할 국가를 해롭게 하고 보호해야 할 국민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것에 가담한 장병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앞서 사례에서 보았듯이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알프레드 드 비니(1797~1863, 프랑스)는 ‘군인의 굴종과 영광’이라는 책에서 ‘붉은 봉랍’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1815년 3월 나폴레옹 군대에 쫓기는 루이 18세의 군대를 뒤따라가던 한 늙은 병사의 얘기다. 그는 행군할 때도 싸움터에 나갈 때도 계속 한 대의 포장마차를 끌고 다녔는데, 그 마차 안에는 한 미친 여인이 타고 있었다. 여인은 그가 선장이었을 때 카이엔느로 유배 가도록 명령받은 한 젊은 유형수(유형살이를 하는 죄인)의 아내 ‘로레트’였다. 

 

그 유형수는 정부를 풍자하는 노래를 지었다는 혐의로 체포돼 17세의 어린 아내를 데리고 카이엔느로 유배를 떠났고, 이송을 맡은 선장은 유배지에 도착해 붉은 봉랍으로 봉인된 정부의 편지를 뜯었다. 그런데 편지에는 유형수를 총살형에 처하라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선장은 정부의 명령을 위반할 수 없어 모두가 잠든 캄캄한 밤에 유형수를 바다 한가운데 데리고 나가 총살했고, 이를 숨어서 지켜보던 젊은 아내는 정신이상을 일으켰다. 

 

정부의 명령으로 유형수의 총살형을 집행한 선장도 정신적 충격을 받아 결국 배를 버리고 보병이 되었다. 그리고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정신이상이 된 유형수의 젊은 아내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리라고 굳게 결심했고, 그 결심을 열여덟 해나 지켜온 것이었다. 

 

늙은 병사의 신상 이야기를 들은 근위 사관은 “당신은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라며 그의 손을 힘껏 쥐었다. 늙은 병사는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이것이 나의 의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나는 무척 오래전부터 나라고 하는 것을 매장해 버리고 말았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붉은 봉랍에 담긴 정부의 명령이 부당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던 노병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평생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다. 

 

이 노병처럼 군인은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명예로움으로 일상의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감내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한 군인들이 반란군이 되었을 때의 참담함과 굴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지난 13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시위장 근처 ‘남대문 커피’에 ‘아침이슬로 만난 어느 계엄군 딸의 고백문’이란 글과 함께 커피 1000잔을 선결제한 분이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에 있는 한 미술 갤러리에서 ‘그리다’라는 이름으로 큐레이터를 하고 있는데, 5.18 계엄군 당시 여군 정보병이었던 어머니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평생 지켜보면서 자란 딸이라며 얘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엄마는 광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곳에 모인 빨갱이를 척결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엄마가 그 도시에서 본 것은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들뿐이었다. 정보병이었던 엄마는 거리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함성과 총성, 찢어질 듯한 비명과 통곡, 매캐하고 기분 나쁜 연기, 그리고 끌려오는 무고한 사람들의 부서진 몸과 당황한 얼굴들, 그 모든 것이 지옥처럼 엄마를 짓눌렀다. 홀로 진실을 찾을수록 더욱 혼란만 깊어갔다. 그 와중에도 엄마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반드시 이곳을 떠나야 해’.”

 

딸이 어릴 적 보았던 엄마는 설거지하며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부르다가 노래 끝자락에 이르면 언제나 목이 메던 엄마의 뒷모습이었다. 긴 세월 동안 외로웠을 엄마에 대한 이해와 함께 역사의 한 가운데서 그들 곁에 있지 못했던 죄책감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계엄군이었던 엄마는 45년이 지났음에도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옳지 않은 일에 가담했었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엄마의 5.18 아픔이 딸의 12.3 1000잔의 커피 선결제로 승화된 것이다. 한강 작가가 말했던 과거가 현재를 도운 것일지도 모른다.  

 

12.3 비상계엄 사태에 투입된 특전사 장병의 자녀들에게 ‘반란군 자식들아 꺼져라’라는 비난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1공수여단 여단장은 “여러분들은 책임이 없고 이걸 지시한 나의 책임이다. 나와 내 상관들의 책임이다”라며 지휘관들의 지시를 따라야 했던 부하들은 무슨 작전을 수행하는지도 모르고 그날 출동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출동했던 계엄군 가운데 상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순히 출동했거나 현장에서 상황판단을 해서 국민을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면 그리고 사전 반란 모의 및 의도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이들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이들까지 반란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는 일은 없도록 정부와 군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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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안 프로필 >>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예비역 육군 준장), 前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 前 777사령관 직무대리, 前 육군본부 정보처장, 前 국군정보사 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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