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20)]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징표(하)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1.08.31 17:33 ㅣ 수정 : 2021.09.01 12:56

학교 방침 준수 및 행사 적극 참여로 훈육점수 손실 최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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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과정의 시험평가 이외에도 훈육점수가 졸업 성적에 영향을 주었다. 

 

훈육점수에는 사격측정과 체력검정 결과도 반영되었고 그밖에 지각, 결석, 조기청소 및 초빙강연 불참도 벌점이 되었기에 학교 방침을 준수하고 행사에 적극 참여하여 학교생활 소홀로 인해 불필요한 감점을 최소화시키는데 주력했다. 

 

헌데 그 중 6.25남침전쟁을 경험했던 한신, 유재흥, 김한룡, 백선엽. 김정곤 장군 등의 초빙강연과 현지 토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아도취(自我陶醉)에 빠져있는 듯 서투르면서도 촌티 흐르는 말투 속에 숨어있는 실전감 넘치는 노장군(老將軍)들의 경험담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군인인 내 자신의 각오를 다시 한번 더 다지는 기회였다.

 

한편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속담처럼 훈육점수에서의 1~2점이 최종 종합성적에서 상중하 평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왜냐면 우등생으로 수료하면 제일 좋지만 졸업 성적이 최소 1/3수준인 ‘상층’에 포함되어야 차후 진급 심사시에 피해없이 선발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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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학에서 초빙강연을 하는 전 연합사령관 부룩스 장군과 학생장교들이 권총 사격 측정을 받는 모습 [사진=육군대학/육군대학 정규 제45기 졸업앨범]

 

각박한 경쟁사회의 서글픔 속에 각종 모임을 통해 친목을 도모하는 즐거운 시간도...

 

육군대학에서도 진급을 고려해 평가를 통해 좋은 성적을 취득해야하는 각박한 상황이 학생장교들에게 뗄래야 뗄 수 없이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임과 동시에 밀착 관계임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또한 서글픈 경쟁사회의 단면을 느끼게도 했다.

 

하지만 각박하고 서글픈 실상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체 및 동기회별 체육대회를 분기별로 시행하였고 가족들을 위한 주부대학 등 각종 모임을 통해 친목을 도모하는 즐거운 시간도 많았다. 

 

또한 새로운 인연을 쌓기 위해 육군대학에 들어온 사람들처럼 교실내의 각자 자리를 기준으로 조별, 줄·오·대각선별로 모임도 있었다. 물론 출신학교, 고향, 기타 연관된 사람 간의 별도 모임은 필수였다.

 

그밖에 함께 근무했던 선후배들은 한잔 술을 나누면서 해후의 정을 만끽했고, 새로운 부대로 부임하는 장교들은 인접 학생 장교들을 통해 사전에 부대의 근무여건을 확인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유익했다. 

 

필자는 육군대학 졸업 후에 수방사로 같이 부임하게 될 박래호 선배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 인접 동국대학교 석사과정을 지원했다. 

 

수방사 작전장교 근무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포기했는데 통신단으로 명령을 받은 선배는 이때 아니면 공부할 기회가 없다며 걱정말고 일단 응시하라고 설득했다. 

 

훈육점수 벌점을 각오하고 하루 결석을 하여 입학 면접을 위해 선배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돌이켜 생각하면 비록 벌점은 받았지만 선배의 강력한 권유가 훗날 석사 학위를 갖게 한 소중한 조언이었다. 사실 부대 임무를 우선했던 필자는 그때 아니면 학위를 받을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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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대학 주부대학에 참여한 학생장교들의 가족들이 강당 앞에서 기념 촬영한 장면과 진해 육군대학 뒤에 있는 장복산 정상 모습 [사진=육군대학 정규 제45기 졸업앨범/김희철]

 

’회자정리(會者定離),’ 졸업식을 치루고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다 

 

육군대학 정규 제45기 졸업식이 끝나자 하나 둘씩 새로운 임지로 떠나는 이사짐차가 아파트를 메웠다.

 

필자는 36년 9개월의 군생활 동안에 총 27번의 이사를 했다. 초급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부대는 GOP 부대 임무 교대가 통상 1년 단위로 시행됐다. 따라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2년마다 이사를 했다.

 

당시에 군용트럭을 이용한 몇번의 이사를 통해 신혼시에 장만했던 장롱을 비롯한 가구들과 거울, 유리그릇 등은 거의 깨지고 망가져 폐품상태가 되었다.

 

이번에도 진해에서 새로운 임지인 수방사로 이사를 하기 위해 이사짐을 꾸렸다. 종이박스를 구해와 그 속에 유리 및 사기 그릇은 신문지로 둘둘 말아 깨지지 않도록 넣었다. 장농이나 밥상 및 책상의 모서리도 흠이생기지 않도록 보조대를 붙이는 등 이사 준비하는 동안 집안 전체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전방 GOP 부대에서 근무할 때에는 그때마다 필자는 뜻하지 않게 당직 근무를 했고, 짐을 꾸리어 군용트럭에 싣고 이사하는 것은 가족의 몫이었다.

 

육군대학 입교시에는 사정상 필자가 홀로 전담해 이사짐을 꾸리고 정리했는데 가족이 첫아들을 안고 돌보아야하는 상황 때문에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사짐을 꾸리다가 방송으로 동기생 및 동료들이 출발할 때에는 밖에 나가 환송을 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몇시간 뒤에는 이사짐차가 도착할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고 분주하게 정리를 하는데 동기생 김용호 소령이 찾아왔다. 그는 이미 이사짐을 모두 꾸리고 타 동기들의 방을 돌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 필자의 이사짐 꾸리는 모습을 보고있던 가족은 서투른 내 모습에 못마땅해 하던 차였다. 김 소령은 필자가 꾸린 짐의 매듭을 보고 “이렇게 꾸리면 다 망가져...”하며 일을 거들어 주었다. 

 

그는 능숙하게 그동안 필자가 정리한 것 보다 오히려 이사짐을 더 많이 더 잘 정리해주어 고마웠다. 드디어 이사짐차가 도착했다. 짐정리를 도와준 김용호 동기생을 깊게 포옹해 주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즉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라는 의미와 같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출발했다. 그리고 1년간의 육군대학 과정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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