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서욱 국방부 장관이 지난 14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장관과 양자 회담을 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이때 양 장관은 2018년 한·프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 국방협력을 활성화하기로 합의한 것을 구체적으로 이행해 국방 분야에서도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구현해 나가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우주·사이버·AI 등 신안보 영역에서의 협력도 강화하기로 했다.
서 장관은 이날 회담에 이어 크리스티앙 캉봉 프랑스 상원 외교·국방위원장과 면담을 하고 프랑스 상원이 지난달 '한국전쟁 종전선언 채택을 위한 프랑스 정부의 노력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데 대해 사의를 표명했다.
장인이 6·25남침전쟁에 프랑스군 대대 소속으로 참전한 캉봉 위원장은 해당 결의안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구축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한국 국방부장관의 프랑스 방문은 2016년 6월 한민구 당시 장관의 방문 이후 약 6년 만이다.
서 장관은 이번 방문을 계기로 파리 4구에 소재한 프랑스군 6·25남침전쟁 참전기념비를 찾아 헌화하고 프랑스군의 희생을 추모했다고 국방부는 전했다.
■ 몽끌레어 육군중장, “6·25남침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면 중령으로 계급을 낮춰, 나를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
프랑스는 6·25남침전쟁 당시 육·해군 3421명을 파병해 이 중 262명이 전사하고, 7명이 실종됐으며 1008명이 부상하는 희생을 치렀다.
1950년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연합군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는 유엔군 파병을 결정했지만 한국에 파병할 여력이 없었다.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알제리 등에서의 식민지 전쟁으로 병력 보충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프랑스는 1950년 7월, 12명의 시찰단만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반기를 든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몽끌레어(Ralph Monclar·1892~1964) 육군중장이다.
그는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모병(募兵)을 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 13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모였다. 몽끌레어 장군은 직접 이들을 이끌고 6·25남침전쟁에 참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시 막스 르젠 국방차관이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데 중장인 당신이 대대장을 맡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이에 몽끌레어 장군은 중장 계급장을 떼고 국방차관에게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면 육군 중령이라도 좋다. 계급을 낮춰도 좋으니 나를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몽끌레어는 결국 중령 계급장을 달고 대대장으로 이국만리의 전쟁에 참전했다.
공산군의 침략으로 백척간두 위기에 놓인 한국을 돕는 일이라면 몽끌레어 장군에게 강등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몽끌레어 장군이 한국에 왔을 때 나이는 58세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6·25남침전쟁에 참전해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중요했던 ‘지평리전투’는 1951년 1.4후퇴 이후, 2월13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산악 전투로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내며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만약에 지평리까지 무너지면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 몽끌레어가 이끄는 프랑스 대대, 지평리 1일차 전투에서 대승리
드디어 1951년 2월11일 중공군이 횡성의 삼마치고개 일대에서 일제히 공격을 재개하여 3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한국군 3군단이 패하면서 지평리까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에 지평리를 방어하던 미23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퇴로가 차단돼 중공군에게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철수 허가 대신 지평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접수하였다.
사실 미23연대는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라운드업 작전’속에서 '미끼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것은 중공군을 찾아내어 소화기와 인력에 의존하는 중공군을 연합군의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으로 섬멸코자 계획된 작전이었다.
미 23연대는 미끼로서 중공군에 던져졌고 중공군은 그 미끼를 덥썩 물게 되었으며 프리만 대령의 부대는 그 속에서 미끼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2월13일 드디어 중공군이 지평리 전방에서 대규모로 집결 중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제보로 확인되었고 어둠이 깔리면서 중공군의 신호탄이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지평리는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한겨울 지평리의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였고 장병들은 긴장속에서 전투 준비를 갖추며 중공군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갈 무렵,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나팔, 호각, 괭과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중공군은 떼를 지어 몰려들었고 장병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중공군의 1제파, 2제파, 3제파를 차례로 격퇴하였다. 중공군의 시체가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한편 육군 중장이었던 프랑스군 대대장은 58세의 노병으로 1, 2차 대전을 모두 경험하고 무공훈장을 17차례나 받은 백전노장이며 참 군인이었다. 본명은 ‘마그랭 버르너리(Magrin Vernery)’이었고 개명한 새이름 ‘몽끌레어’로 중령 대대장이 되어 또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 프랑스군 대대의 장병들도 대부분 이와 같이 전쟁을 위하여 자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용맹성과 전투능력은 어느 군대보다도 강하고 철두철미했다. 프랑스군 대대 전방에서도 중공군의 피리와 꽹과리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물밀듯이 중공군이 몰려들어 왔다.
이때 프랑스군 진지에서 난데없이 사이렌(신호 및 조기 경보용으로 중대급에 보급된 휴대용 수동식 사이렌임)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중공군의 피리 소리와 꽹과리 소리를 삼켜 버렸고 중공군은 신호 및 연락이 끊기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일제히 화력을 집중하면서 진지를 박차고 나가 중공군을 닥치는 대로 쏘고 찌르는 육박전이 벌어졌고 중공군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5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날 밤 중공군은 감히 재공격을 하지 못했다. 한 병사의 사이렌 울리는 기지가 대대 전체를 구하며 참으로 값진 승리를 쟁취한 순간이었다.
밤이 지나갔다. 중공군은 3개 사단 병력으로 1개 연대전투단이 방어중인 지평리를 밤새워 포위공격을 하고서도 함락하지 못한 채 시체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퇴각하였다.
1.4후퇴 후,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자유의 전사부대’가 최초로 중공군을 격퇴시키는 ‘지평리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중공군은 공격을 중단하게 되었고, 연합군은 몰리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을 만들어 북을 향해 전진하게 된다.
이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 중 한명은 바로 프랑스의 ‘자유의 전사부대’ 대대장 랄프 몽끌레어 장군이었다.
■ 지평리전투, 중공군 괴멸시켜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거둔 최초의 완벽한 승리…!
프랑스군이 승리한 이후 전투 3일차에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미 9군단에 ‘지평리 연결작전’을 명령하였고, 미1기병사단 5기병연대장 크롬베즈 대령의 이름은 딴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전차 23대를 앞세우고 지평리로 진격하게 되었다.
한편 지평리에서는 프리만 대령의 부상이 악화돼 후송되었고, 연대장 임무를 대신하게 된 2대대장 에드워드 중령은 우선 야간에 피탈된 전선에 대하여 주간 역습을 실시하여 회복하도록 명령하고 야간작전 준비에 돌입했다.
동시에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의 연결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진지 앞에 설치한 지뢰를 제거하고 전차 4대로 중공군의 배후로 우회하여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기습적인 역습을 시도했다.
더불어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중공군의 지휘소와 탄약고 등 전투근무지원시설을 잇따라 유린하면서 파죽지세로 돌진했다. 드디어 양군의 전차가 마주치면서 연결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의 충격적인 기동전으로 중공군들을 완전히 제압하자 적들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이 광경은 군대가 아닌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었다. 연합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마치 풀을 베는 농부처럼 메뚜기를 사냥하듯 중공군들을 쓰러뜨렸다.
이 전투는 중공군이 6·25남침전쟁에 개입 이후 후퇴와 패배를 거듭하던 유엔군이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전투로서 그동안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유엔군이 거둔 최초의 완벽한 승리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몽끌레어를 비롯한 지휘관들이 전장에서 어떻게 행동했는가이다. 이들이 당시 보여준 모습은 지휘관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미 23연대 전투단의 프리만 연대장은 부상 중에도 후송을 거부하고 장병들과 생사를 함께 했는데,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중공군의 포화를 뚫고 헬기로 전장을 방문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바로 손자병법 모공편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의 진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58세의 프랑스군 대대장 몽끌레어 중령은 이 전투에서 상식을 초월하는 진정한 군인으로서의 모범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 장병들이 엄동설한의 꽁꽁 얼은 야지에서 구축한 진지는 그들이 흘린 땀만큼 피와 목숨으로 보답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6·25남침전쟁’의 국가적 절명 위기에서 보이지 않는 희생을 통해 나라를 지켜낸 숨겨졌던 국내의 영웅 및 애국자들에게 감사와 보은이 중요하다. 하지만 미군 프리만, 크롬베즈, 프랑스군 몽끌레어 등 알려지지 않은 유엔군 영웅들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
다시 한번 ‘지평리 전투’에서 장열히 산화한 미·프랑스군의 전몰장병들의 명복을 기원한다.
이번 한·프 국방장관회담시 우리 서욱 장관이 ‘프랑스군 6·25남침전쟁 참전기념비’와 ‘몽끌레어’장군 묘소를 찾아 헌화하고 프랑스군의 희생을 추모했다고 한다. 이 것은 매우 당연하고 잘한 일이다.
앞으로도 우리나라를 구해준 프랑스의 ‘자유의 전사부대’를 비롯한 67개 해외지원국에 감사하고 추모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명확히 부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렇게 선양해야 한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