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과 재래시장
[뉴스투데이=윤혜영 전문기자] 날씨운도 지독하게 없다. 거의 매일 축축한 비가 간헐적으로 내렸다. 낮에는 기습적으로 덥고 밤에는 은근히 추워서 아이들에게는 하나 있는 이불을 덮어주고 나는 롱패딩을 덮고 잤다.
레지던스 수영장에서 수영강습 회원을 모집하고 있다기에 아직 수영을 배우지 못한 첫째 아이는 주 3회 저녁 7시에 수영을 배우기로 했다.
수영을 배우는 시간대에는 바람까지 불어서 주최측에서 긴급으로 공수해온 웻슈트를 입어야 했다. 래쉬가드나 수영복만으로는 한기를 피할 수 없어 아이들이 찬물 입수를 힘겨워하자 협력업체에서 대량으로 공수를 해와서 개당 3만원에 판매를 했다.
수영장은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있어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기 좋았다.
똑같은 디자인의 검은색 웻슈트를 입은 아이들이 물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장어처럼 구불텅거렸다. 다섯 살에서 열 세 살 사이의 아이들은 3명 이상 모이게 되면 ADHD 성향을 띠는 것 같다. 강습은 말레이시안 남자 선생님 두 분이 지도를 하셨다.
20대 초반의 약간의 수줍음이 있는 두 청년들은 바싹 말라 굴곡이라고는 전혀 없는 몸이 납작하게 누른 부침개 같았다. 수영도 배우고 영어도 사용할테니 일거양득이라며 내심 좋아했는데, 수영강사들이 한국어를 너무 잘했다.
반면 아이들은 서툴게나마 영어를 썼다. “제니. 머리 담궈. 발 더 힘차게” 말레이시안 선생님이 한국어로 소리치면 아이들은 “Yes, Sir” 이라고 영어로 대답했다.
‘말레이시안들이 한국어를 왜 하나. 그냥 영어를 쓰지. 다정도 병이야’ 그 상황이 못마땅한 나는 머리를 흔들며 구석으로 가서 핸드폰 속의 가쉽 기사들을 파고 들었다.
백프로 한국 아이들로 이루어진 수영강습 시간에는 아이의 엄마들이 수다를 떨며 대기하고 있었다. 어학원이나 국제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둔 엄마들은 두세명씩 혹은 그 이상으로 무리를 지어서 몰려다녔으며 아이들이 하교하면 자녀들도 합세해 식당이나 레고랜드에도 함께 다녔다.
나는 한국에서도 그렇듯 조호바루에서도 외톨이였다. 나는 어릴적부터 무리생활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아이였었다. 때에 따라 사회적인 얼굴로 갈아끼우면서 살아왔지만 단체생활은 여전히 힘들다.
Outsider와 Insider. 아싸와 인싸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를 ‘그럴싸’라고 부른단다.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으로 부유하는 나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다.
요즘 틈이 날 때마다 읽는 책들은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와 찰스 부코스키의 에세이다. 좋아하는 작가들도 사회적인 기준으로는 ‘아싸’였던 사람들이다.
성향이 지극히 ‘독고다이’스타일이어서 가끔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엄마가 살가운 성격이였으면 또래 엄마들과 어울려서 친구도 만들어주고 감정적인 교류도 활발했을 텐데 싶어 가끔 아쉽다.
이런 나를 두고 지인은 ‘물어뜯긴 소’ 같다는 비유를 하던데, 다음 생에는 애교가 피자치즈처럼 넘쳐흐르고 풋사과처럼 상큼발랄하고 직박구리 만큼 수다스러운 여자로 태어나서 살아보고 싶다.
매주 수요일마다 부킷인다 지역에 재래시장이 열린다고 하여 큰아이 하원 후 시장구경을 갔다. 그랩을 호출해서 바퀴벌레가 없는지 둘러보고는 좌석에 몸을 실었다. (마음 같아서는 핸드폰의 후레쉬를 켜서 좌석 밑 까지 살피고 싶었지만 택시 기사님이 욕을 하고 그냥 가버릴까봐 그럴 수 없었다)
그랩은 약 15분을 달려 오밀조밀 단층으로 늘어선 주택가에 중간중간 상점들이 박힌 대로에 멈췄다. 내리니 바로 앞에 커다란 주유소와 KFC가 있었다.
시장은 매우 복잡한 곳이니 엄마 손 놓치면 안된다고, 고대로부터 아이들을 잊어버리는 대표적인 장소는 ‘시장’이라고, 국제미아가 되어 영원히 못 만날 수 있으니 절대로 방심을 하면 안된다며 공포감을 조성해놓고 두 아이의 손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차라리 포승줄에 묶어서 끌고 다니면 서로 편할거라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쪽으로 무작정 따라갔다.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친정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온 아주머니, 아이들과 나온 여인, 수다를 떨며 웃는 여인들. 넓지 않은 시장의 골목길을 걷는 이들은 모두 한국 사람이었고 상인들만 현지인이었다.
길바닥은 쓰레기 하나 없이 비질한 듯 깨끗하였다. 동남아에 흔하디 흔한 걸인이나 부랑자도 한 명 없는 재래시장은 백화점 푸드코트처럼 청결했다.
트래블월렛으로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국제학교와 골프장만 오고 가는 한국 엄마와 아이들이 포집한 조호바루에서는 거지 업계도 수입이 원활하지 않을터. 좀 더 다양한 계층의 여행객들이 찾아오는 캄보디아의 톤래샵이나 태국의 짜뚜짝 등지로 근무지를 옮겨간 것이라 짐작되었다.
골목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도열한 노점에는 과일, 각종 꼬치류, 말레이시아 주전부리 ‘꾸이’, 딤섬과 빵, 조악한 재질의 옷과 신발, 캐릭터 장난감들이 간택을 기다리며 늘어서 있었다. 시장의 줄은 500m쯤 외길로 이어졌다. 끝까지 올라갔다가 반대로 내려오며 훑어보고는 찻 잎에 삶은 갈색 계란을 한 봉지 사고 빵도 몇 개 구입했다. 가격은 현지 화폐 링깃으로 치뤘다.
커다란 두리안들과 삼각형의 대열로 쌓아올린 망고가 아니라면 이곳이 동대문 시장인지 신길동 시장인지 조호바루의 부킷인다 수요시장인지 얼핏 봐서는 구분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
행인들이 줄을 서서 호떡 비슷한 것을 사고 있길래 대열에 합류했다. 상인이 몇 개를 원하냐고 영어로 묻길래 한국말로 “두 개요” 했더니 정확히 두 개를 종이에 싸서 건네주었다.
어떤 위협이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 한국의 평일 오후의 시장 같았다. 소매치기를 대비하여 속옷에 박음질해둔 돈주머니가 무색해졌다.
팟퐁이나 카오산 로드의 거대한 혼돈과는 대비되는 평온함이었다. ‘현지인’스러운 곳에 굳이 가는 이유는 보여주기 식으로 치장한 겉모습 뒤에 숨은 ‘민낯’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곳에나 흔하게 널린 대형 쇼핑센터에서는 ‘그 곳’의 삶을 짐작할 수 없다.
마치 시상식을 앞둔 여배우처럼 한치의 흐트러짐도 허용치 않는 헤어스타일과 각도기를 대고 그린 듯한 눈썹, 먼지 한 점 허용치 않는 구두. 완벽한 ‘보여짐’을 추구한 모습에서 진실을 읽을 수 있을까?
먹거리 몇 개를 사고는 온 길로 거슬러 와서 KFC에 가서 햄버거를 주문했다. 약간의 양상추와 튀긴 닭가슴살이 든 식은 햄버거는 싱가폴이나 조호바루나 한국에서나 늘 먹어온 그 맛이었다. <25화에 계속>
윤혜영 프로필 ▶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남 통영 출생. 계간 ‘문학나무(발행인 황충상 소설가)’겨울호를 통해 신인문학상 중 수필 부문 수상자로 등단. 주요 저서로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화가들이 만난 앙코르와트’ 외 항공사와 증권사, 신문사 및 문화예술지 등 다수에 문화칼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