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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위기관리

전후 위기극복의 숨은 공로자 벽안의 한국인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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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2.05.03 14:23 ㅣ 수정 : 2022.05.03 14:23

위트컴 장군, 마지막 임무로 여겼던 ‘장진호 전투’ 전사자 유해발굴 및 송환 사업에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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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과 격렬한 ‘장진호 전투’로 지친 미7사단 31연대전투단 병사들이 눈 덮힌 장진호가 보이는 참호에서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좌측)과 128km의 죽음과 공포가 뒤섞인 포위망 돌파 혈투를 마치고 흥남항에 도착하는 미 해병대 1사단 장병들(우측). [사진=생명의 항해]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에 남아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라 불린 위트컴 장군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2년 심장마비로 타계하기 전까지 은밀하게 북녘에 있는 미군 유해 송환 사업에 나섰다. 

 

그는 6·25남침전쟁 중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를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걸 생애 마지막 임무로 여겼고 그의 평생 숙원이었던 사실을 아내 한묘숙 여사에게 밝혔다.

 

장진호는 1950년 영하 40도의 겨울 혹한에 미 해병대 1사단 1만여 명과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일대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원 절반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남하는 2주간 지연됐고, 피란민 등 20여만 명이 그 유명한 ‘흥남철수’를 할 수 있었다. 생전에 위트컴 장군은 아내에게 “장진호에 수천 구의 미군 유해가 있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북한을 다녀왔던 한 여사는 생전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사람에게서 당시 미군 병사들이 죽을 때 ‘마미(Mommy)!’하고 외치더라는 증언을 들었어요. 북쪽 사람이 저에게 ‘마미’가 뭐냐고 물어 ‘엄마’라는 뜻이라고 대답해줬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 사람이 '미국 놈들이 오마니를 찾다가 죽어갔구나'라고 말할 때, 장군의 유언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이역만리에서 엄마를 찾으며 죽어간 불쌍한 영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어요“라고 그녀는 안타까워했다.

 

당시 위트컴은 공인의 자격으로 자신이 적성국인 중국이나 북한에 들어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미국 시민권자가 된 한묘숙 여사를 통해 유해 발굴사업의 가능성을 타진하려 했다.

 

한 여사는 남편의 소개서 한 장만 지닌 채 방법을 수소문하며 관계자들을 접촉하기 위해 100여 차례 홍콩을 방문했다. 그 결과 1979년에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고, 북한이 정치적 흥정을 붙이기도 했지만 1990년부터 1995년 사이에 23차례나 북한을 다녀왔다.

 

그리고 부창부수(夫唱婦隨)였다. 한 여사는 북한이 문을 닫아버렸던 1995년 이후에도 2017년 임종 직전까지 장군의 유지에 따라 미군 유해 송환에 지속적으로 끝까지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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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산 재건 계획을 보고하는 위트컴 장군과 존경하는 남편 위트컴 장군의 사진을 들고 있는 생전의 한묘숙 여사. [사진=박주홍]

 

 남편이 구태여 나와 결혼한 건 자신이 죽어도 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

  

돌이켜 보면 결혼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을 맡아 백악관과 긴밀히 연락하며 한미 외교라인의 가교 구실을 했던 위트컴 장군은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고문 신분으로 사이공에 갔다. 그때 한 여사도 함께 따라가 그곳에서 몇 해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위트컴 장군은 한 여사에게 “홍콩에 한 번 다녀오라”고 부탁했다. 홍콩에서 중국으로 갈 방편을 마련해보라는 말도 남겼다. 그 이유는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한 여사가 홍콩을 드나들던 1979년, 홍콩 사업가의 초청으로 중국 본토에 입국할 기회가 생겼다. 그때 위트컴 장군은 아내에게 “6·25남침전쟁 때 죽은 미군 병사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며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2011년 4월 주간동아에 실린 한 여사의 생전 인터뷰는 이렇다. “장군님이 왜 중국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그토록 애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가 중국으로 갈 때면 장군님은 지도 한 장과 만날 사람의 리스트, 미국대사관 위치를 알려줬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장군님은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에서 무관으로 일한 적이 있어 그때 사귄 중국 고위층을 잘 알았어요”라고 덧붙였다.

 

또한 “베이징 서우두(首都) 국제공항에 내리면 마중 나온 사람이 ‘홍치’(紅旗·중국 자동차 상표)를 끌고 와 나를 에스코트했는데, 장군님이 다 연락을 해놓았는지 그대로 따라가면 됐어요”라며 신기한 듯 미소를 지었다. 

 

특히 중국이나 북한에서는 유해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는 위트컴 장군도 일절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만약 우리가 ‘뼈다귀’ 찾으러 왔다면 아마 미쳤다고 오해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수십 차례 한국과 중국을 오가다 그녀는 아예 중국에 눌러앉았다. 주로 베이징호텔과 젠궈(建國) 호텔에 투숙했는데, 젠궈호텔 810호에서는 8년간 거주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기자가 “30년이 넘었는데 왜 지금까지 미군 유해 발굴을 계속하느냐”고 묻자 한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장군님이 돌아가실 때도 ‘북한에 묻힌 유해를 제발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데요. 그래서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어요. 사별 후에 미혼이었던 그가 구태여 나와 결혼한 건 자신이 죽어도 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회상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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