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 방문한 대통령 후보들의 진면목 ③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인 킹메이커·풍운아 김종필 총리(상)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부대의 주요 임무가 부여되었을 때 필자가 속한 작전참모부에서는 총괄 업무로 매번 마지막까지 남아 종합을 하는 것 때문에 피로가 쌓여간다.
하지만 작전은 계획하고 진행을 추적하는 주무 부서이다. 따라서 모든 일을 혼자서 하려고 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기본 계획이 수립되면 그 세부추진은 각 참모부/기능별로 임무를 분담하여 시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종합 업무로 피로가 과중되는 것을 오히려 주무 참모부라는 긍지로 승화시키며 즐거워했다.
필자가 승리부대 소대장과 수방사 작전장교 시절을 통해 계속 인연을 맺어왔던 당시의 작전참모 김형배 중령은 각 참모부를 총괄하는 참모업무를 하기 위해 필자에게 용병술에 대해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다.
그는 “써먹을 놈에겐 의리를, 불안해 하는 놈에겐 인정과 신뢰를, 활용할 놈에겐 격려와 확인하라”는 진심어린 충고를 하며 “모든 업무와 부대운용은 조직활용이 중요하다”는 진리와 철학을 강조했다.
그해 12월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대법원장, 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장군까지 국가의 거물급 중요 인사들의 격려 방문은 인사, 군수 등 각 참모부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안내와 의전은 인사참모부에서 방문자에게 보여줄 장벽 피복류 및 주요 장비 전시와 사병식당에서의 식사준비는 군수 참모부에서 방송 장비와 통신 지원은 통신대장이 책임지고 각각 준비를 했고 사전에 사단 참모장이 준비 사열까지 시행했다.
헌데 모든 행사는 첫인상인 회의실에서의 부대 현황 보고시에 성패가 거의 결정되었다. 따라서 사단장은 방문객별로 어떤 내용으로 보고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했다. 더불어 사단장은 환등기, 자막교체, 회의실 바닥 정비 등도 보강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작전참모 김 중령은 사전 준비된 자료 등을 활용하여 번개불이 튀는 듯한 기발한 착상과 기동력으로 방문객이 가장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용어만 선정하여 심금을 울리게 만든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참모업무 수행중 사단장의 보고 연습시간을 충분하게 확보하도록 지휘관에게 시간을 많이 보장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모든 것을 사전에 준비하도록 독촉했다. 물론 사단장이 준비하다가 추가로 보강해야 될 소요가 발생되기도 하여 더 바쁘긴 했으나 결과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 풍운아 김종필, “조선인은 왜 병역의무에 참여하지 않나?”라며 시비 건 일본인 선배를 때려눕히고 귀국
당시 부대 방문자 중 한 명인 신민주공화당 대표였던 김종필은 사병식당에서 식사를 함께하며 병사들을 만나 격려하겠다고 통보하여 작전처뿐만 아니라 각 참모부 모두가 더 바빠졌다.
킹메이커이자 풍운아인 김종필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실 정치에 복귀하여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82만 표를 얻으면서 4위에 오른 뒤, 1989년 말 노태우, 김영삼과 비밀리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합의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였다.
부대 방문 당시에 그는 1992년의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지지했고, 김영삼 정권 초기에 민주자유당 대표를 지냈다.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연합해(DJP연합) 김대중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뒤 두번째 국무총리직를 맡았다.
김종필 총리는 1926년 1월, 충남 규암면장이던 부친 김상배의 7남 중 5번째로 태어났다. 부여보통학교와 공주중학교를 졸업했는데 동맹 휴학을 주도하다 두들겨 맞고 공주경찰서 사상계에까지 넘겨졌다가 면장이던 아버지가 빌어 겨우 빠져나왔다. 이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1944년주오대학예과(예비과정) 독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인은 왜 전역(戰役, 병역 의무)에 참여하지 않나?”라며 시비를 걸던 일본인 선배를 때려눕히고 자퇴원서를 던지며 도망치듯 귀국한 뒤,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했는데 교생 실습 중 일본인 교감과 말다툼 끝에 또 때려눕혀 결국 일본 육군헌병대 영창까지 구경했던 풍운아였다.
역시 면장이던 부친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퇴교는 면했지만 보복 조치로 산간 오지 학교로 발령이 났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사표를 제출했을 때 8.15 광복을 맞았다.
그는 다시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는데 5.16군사정변의 동지 김용태와 동기생으로 만난다. 이후 경성사범학교를 그만두고 충남 온양의 육군 13연대 사병으로 입대했으나 해방 정국의 혼란 상황에서 당시 군대의 악폐습과 가혹 행위를 못 이겨 불침번을 서던 와중에 탈영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학교 동기생인 김용태의 자취방에 얹혀살며 한심한 처지의 울분을 억누르며 지내던 중, 옛 황금좌극장(현 국도극장)으로 바람을 쐬러 갔다가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와 마주쳤다.
김종필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극장 매점에 있던 교도대 중대장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고 재입대하겠다고 하자 탈영이 흔하던 전쟁이전 시절이라 중대장은 흔쾌히 김종필을 받아들였다.
■ 6·25남침전쟁 발발일 새벽, 육본 당직장교 김종필 중위은 북한군 침범 소식을 국방장관, 육본의 각 국장들에게 긴급전파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에서 다시 사병으로 복무하던 중 김종필을 눈여겨보던 중대장이 그에게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권유하자 이를 받아들여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하게 된다.
이후 8기생 졸업식에서 우등상장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보병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때 1,300여명의 8기 졸업생들 중 32명만이 육군본부로 배속됐는데 김종필 역시 그 중 1명이었다.
김종필은 정보장교로 배정되어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북한반장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 박정희와 인연을 맺어 6.25남침전쟁전 서울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영옥을 만나 결혼하고 박정희의 조카 사위가 되었다.
한편 정보국의 북한반장 김종필은 이미 전선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북으로 정찰요원들을 급파했지만 전원이 연락 두절되었고, 1950년 6월25일 새벽 육군본부의 당직 장교로 근무하던 그는 북한군이 침범했다는 소식에 전면전임을 직감하고, 채병덕 총참모장, 신성모 국방장관 및 육본의 각 국장들에게 상황을 전파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일개 중위였던 김종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후 1951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미국 유학 장교단에 뽑혀 조지아주의 포트 베닝(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연수를 수료했다.
이 때 딸 예리를 얻었는데 부인 및 가족들은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 6·25남침전쟁 후반부인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6사단19연대의 수색중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을 제외하면 계속 정보 장교로 복무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