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 방문한 대통령 후보들의 진면목④ :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인 킹메이커, 풍운아 김종필 총리(하)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종필은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제2공화국 시절에 부패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 운동'을 벌이다 '항명 파동'으로 강제 전역되었다.
이후 그는 예비역 중령의 신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5.16군사정변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쿠데타 성공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준장으로 다시 예편했다.
제3공화국 군사정부에서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군림했으며, 강력한 정보기관 설립을 주장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당시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대외 정보수집을 주임무로 하는 CIA를 벤치마킹하여 만들었다지만 실제로는 국내 방첩 위주였던 FBI모델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실은 철저한 박정희 정권의 호위조직이었고, 중앙정보부의 표어인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또한 김종필의 작품이다.
한때 김종필은 박정희 친위 세력의 견제로 여러차례 장기간 외유를 떠나기도 했으며 외유를 떠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한 발언으로도 유명하다.
특명전권대사 직함으로 1년 넘게 외국을 다니면서 수교협상 임무를 맡기도 했다. 특히 미·일의 적극적인 주도로 시작된 1964년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의 막후교섭으로 한일협정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때 대일 청구권 자금의 가장 큰 몫을 가져간 것은 대표적 공업 기반시설인 포항제철이었는데 전체 자금의 절반이 넘는 55%가 투입되었다.
이 밖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소양강댐 건설,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및 상하수도 시설 확충 비용으로 할당된 청구권 타결액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총 8억달러였다.
베트남 파병으로 받은 60억 달러와 비교하면 36년간의 지배에 대한 배상금으로는 헐값이라고 볼 수도 있다.
헌데 무상자금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본, 대만에 이어 강국이던 필리핀이 5억5000만 달러로 가장 많았고 이어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가 2억2308만 달러, 미얀마가 2억 달러, 베트남이 3900만 달러 순으로 유무상을 모두 합쳐 필리핀과 더불어 가장 많은 자금을 받아낸 셈이다.
■ 박정희 정부의 충실한 2인자 역할 후에 킹메이커로 자리매김한 김종필의 정치활동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유를 떠났던 김종필은 1965년 12월 민주공화당 의장으로 다시 선출되고,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 지역구로 출마해 당선된다.
1971년 3월 본인이 신설한 초대 부총재가 되어 1971년 5월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의원 1번으로 출마하면서 또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런데 민주공화당이 1971년에 있었던 2차례의 선거에서 참패를 당한 상황에서 이를 수습하는 차원으로 그해 6월에 국무총리로 지명되어 다시 박정희 정부의 충실한 2인자로 행동하며 1972년 ‘10월 유신’에도 현직 국무총리 입장에서 지지했다.
1973년에는 유신정우회로 입당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10월유신’ 이후로 박정희는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는 상황만 나타냈고,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충돌하던 김종필은 지쳐버려 결국 1975년 12월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국무총리직을 사퇴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 ‘10.26사건’ 이후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총재가 되었으며 민주헌법에 따라 직선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유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는 불출마했다.
이 시기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이른바 '3김'의 한 축으로서 서울의 봄을 구가했으나 ‘12.12사태’ 이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서 정치 활동이 금지당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실 정치에 복귀하면서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82만 표를 얻으면서 4위에 올랐다.
이후 김종필은 1989년 말 노태우, 김영삼과 비밀리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합의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였다.
무적태풍부대를 방문했던 1992년의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지지했고, 김영삼 정권 초기에 민주자유당 대표를 지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연합했으며 이를 DJP연합이라 칭했다.
DJP연합의 성공으로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김종필 총재는 두번째 국무총리직에 오르며 공동 정부의 한 축을 맡았다. 그러나 집권 후 2년 이내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시작했던 DJP연합은 199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가 내각제 개헌 미이행과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탈당하며 DJP연합은 깨졌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비충청권 지역에서는 보수표를 모조리 한나라당에 뺏기면서 사실상 군소 정당으로 전락됐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면서 다시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명예 상임고문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나, 이후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2009년 김대중, 2015년 김영삼에 이어서 2018년 가장 고령이었던 92세의 김종필까지도 운명하면서 ‘3김시대’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 군 후배들에게 소홀했음을 표현하던 풍운아 김종필도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해...
김종필 전 총리가 무적태풍부대를 방문할 당시인 1992년 말에 그는 ‘신민주공화당’ 총재 신분의 킹메이커로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지지했던 시기였다.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고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하여 국방력 강화와 방위산업 발전에 노력했다. 그러나 사실 국방은 미군에 의존했고 국민들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새마을 운동 및 경제발전에 우선해서 더 많이 전력투구했다.
김종필은 자신이 제3공화국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군림했으며 이후에도 정권 핵심의 위치에서 업적도 많았고 영향력도 대단했지만 군발전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있었다.
제14대 대선에서도 킹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당대표의 자격으로 연말 전방부대 위문을 온 김종필은 부대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했지만 열악한 환경을 직시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장병 복지 등 군의 발전을 위해 소홀했던 것에 대한 회한이 남아있는 표정이었다.
회의실에서의 업무보고를 받고 전시된 화기, 장비 및 피복 등을 둘러본 후 장병 식당에서 자율배식으로 점심을 받아 어린 병사들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첫 수저를 들기 전에 함께한 장병들에게 진심어린 한마디로 군의 대선배이면서도 제대로 역할을 못한 심정을 표현했다.
당시 67세의 노장이자 모진 풍파를 겪으며 풍운아 인생을 살아온 김종필의 첫 마디는 “미안합니다......!”였다.
이어 그는 감회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사단장으로부터 훌륭한 보고를 받고..., 진열된 장비들과 이곳 식당에 들어와 장병들을 보니까...,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국토방위를 위해 말없이 굳굳하게 책임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고맙고 든든합니다”라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천천히 진심을 전하는 김종필의 첫마디가 멈추자, 식당안의 전장병들은 마치 노쇠한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위하는 마음처럼 느끼며 감동이 가슴 깊히 파고들어 순간 우렁찬 박수를 터뜨렸다.
김종필은 일본인들과 맞섰던 풍운아 청년 시절을 보내고 장교로 임관하여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른바 '정군 운동'으로 강제 전역되었다가 5.16군사정변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준장으로 전역한 군선배였다.
또한 지난 40여년을 정권의 핵심에서 국가발전을 위해 매진했지만 초라한 당시 군의 현실을 확인하고 그동안 군발전의 역할에 소홀했던 것을 자책하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의 방문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어 흐뭇했지만, 그의 진심어린 언행은 긴 여운을 남기었다. 그는 이후에도 킹메이커이자 풍운아의 삶을 지속하다가 ‘제2의 한명회’로 불리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