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윤혜영의 '싱가포르·조호바루' 한달살기 (13)] 오늘 나의 부캐는 자식 교육에 진심인 신사임당
윤혜영 전문기자 입력 : 2024.03.30 14:38 ㅣ 수정 : 2024.03.30 14:38
해리포터 오르골을 가지고 놀고 싶다는 아이들을 달래서 당가베이 비치행을 선택 시끌벅적 번잡한 해변을 상상했으나... 빛 바랜 파라솔들과 스산한 바람에 실망해 "여기 너무 싫다"는 아이들과 함께 허둥지둥 그랩을 불러 타고 힐튼호텔로 되돌아와
[뉴스투데이=윤혜영 전문기자] 조호바루에서의 이틀째 날이다. 오늘 아침 역시 아잔의 음성이 찾아와 그만 자고 일어나 기도하라고 일깨워주었다. 겨울이 싫어 비행기를 타고 여름을 찾아왔는데 한국의 겨울을 연상시키는 우중중한 대기. 찌뿌둥한 몸을 굴려 아이들과 조식을 먹으러 갔다.
타블로이드 신문을 가져와서 채소를 올린 접시를 조금 옆으로 밀쳐 두고 골똘히 들여다 본다. (글은 패스하고 사진만 본다) 친절한 서버가 다가와 커피를 마시겠냐고 묻는다. 나는 밥 보다 신문이 우선인 지성인답게 커피 대신 떼타릭을 부탁한다고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채 답했다.
“엄마, 왜 예쁜척해?” 큰애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접대용 표정이야. 쿠키 그만 먹고 밥이랑 생선 가지고 와.”
“우리한테 말할 때랑 표정이 다르잖아.” “조용히 해라. 스미글 안 사준다?”
스미글은 일명 ‘강남 필통’이라 불리우는데 한국에는 매장이 몇 없어서 싱가포르나 조호바루에 가면 꼭 사와야 한다고 맘까페에서 정보를 입수한 아이들 학용품 브랜드이다.
인근 패러다임 몰에 스미글이 입점해 있다고 하여 그랩을 타고 가보기로 했다. 그랩을 호출해서 패러다임 몰로 갔다. 몰 1층에 스미글이 있었는데 규모는 작았으나 디즈니와 해리포터 캐릭터의 필통과 가방, 도시락 가방, 텀블러, 볼펜 등등이 알차게 있었다.
아이들은 무서운 집중력으로 그것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하루이틀은 말을 잘 듣게 도와줄 것들이었다. 1층에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이 있었는데 한국과 가격이 비슷했다. 대형 브랜드 체인들은 대부분 한국과 가격이 비슷하거나 조금 더 비싼듯 했다.
커피원두와 드리퍼, 그라인더를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달을 있어야 하니 매일 4~5잔씩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나로서는 비싼 커피값과 들쑥날쑥한 원두의 맛을 견딜수 없을터, 미친듯이 스트레스가 쌓일것임에 분명했다. 그리하여 짐을 줄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뽁뽁이로 수십겹을 싸서 가져온 것이었다.
커피맛이 좋고 가격도 적당한 조호바루의 단골 코피티암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커피 수혈이 급해 한화 5천원 정도의 가격을 지불하고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서 마셨다. 아이들은 쇼핑백에 담아온 스미글 학용품들을 꺼내 들뜬 목소리로 수다를 재잘거리며 그것들과 교감에 빠져들었다.
달리 할 일도 없어서 당가베이 비치에 가보기로 했다. 아이는 스미골에서 구입한 해리포터 오르골을 가지고 놀고 싶다며 호텔로 바로 가자고 했지만 나는 점잖게 만류했다.
“우리 여기 여행왔지? 오르골은 한국에서도 가지고 놀 수 있지만 오늘의 당가베이 해변은 오늘만 갈 수 있는거야. 한국에 돌아가면 여기 다시 오기가 얼마나 힘들겠어. 오르골은 넣어두고 해변에 가서 모래놀이 하고 놀자”
오늘 나의 부캐는 자식 교육에 진심인 신사임당이었다. 그랩을 호출해 당가베이로 갔다. 누가봐도 왕궁임이 분명한 건물이 보이고 몇 백 미터 더 가서 당가베이에 도착했다.
영업을 오래 전에 멈춘듯한 낡은 건물 앞에 우리는 도착했다. 시끌벅적 번잡한 해변을 상상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건물 뒤로 돌아가자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근처에는 녹이 슨 놀이기구 몇 개랑 언제 또 펼쳐질지 모를 빛 바랜 파라솔들이 몇 있었다.
“여기 맞아?”
“응. 여기 좋다고 누가 그러던데 이상하네. 여기 맞나?”
나는 당황하며 서둘러 핸드폰을 뒤적거려 확인하는 척 했다. 구글맵에도 이곳이 맞다고 나오고 그랩기사도 네비게이션을 보며 왔던 것이다. 스산한 바람이 모래를 날렸다. 마치 80년대 초반의 어느 철 지난 해변으로 회귀한 듯 했다. 보통 드라마에서는 남녀가 이런 배경의 해변에서 이별을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분위기가 다운되고 우리 모두 말이 사라졌다.
하와이나 해운대처럼 인파가 바글거리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든 아이들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을 떠올렸던 나는 멘붕에 빠져 시퍼렇게 몰아치는 파도만 바라보았다. 저 멀리 끊어진 갈색의 철로가 보였고 우리는 말 없이 그쪽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삭아서 끊어진 철로 틈으로 피어난 잡초들과 노란색 꽃이 해풍과 쓰레기들 사이에서 흔들거렸다.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TV드라마나 영화에 꼭 나오는 클리셰. 한적한 바다를 찾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갑작스레 한무리의 불량배들이 나타난다. 반팔 티셔츠를 입고 문신을 드러낸 그들은 튀어나온 배를 과시하며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날렸다.
“어이. 아짐! 여기 나 좀 보소”
“저... 저 말인가요?”
“여기 아짐 말고 누가 또 있당가? 있는 링깃 다 꺼내고 가쇼. 뒤져서 나오면 1링깃에 한 대씩 패줄탱께. 힘 빼지말고 줄 거 주고 갈 길 갑시다"
나는 두려움에 덜덜 떨며 지갑을 꺼내다가 돈을 막 흘리고 그러는데, 바로 그 순간 차은우를 닮은 사내가 나타난다.
“어이, 거기. 숙녀분들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보내주시지.”
“이건 또 어디서 굴러들어온 똥덩어리야. 안꺼져? 야! 이 새끼 조져!”
차은우를 닮은 사내가 번개처럼 몸을 날리더니 불량배들을 제압한다. 한 명은 날아가 바다에 거꾸로 쳐박히고 한 명은 회전목마에 날아가 기절했다. 사내의 기세에 나머지 불량배들은 슬금슬금 뒷걸음 치더니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다.
차은우가 그윽한 눈빛으로 내게 다가온다.
“괜찮아요? 다친곳은 없어요? 그런데 혹시 우리 어디에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엄마! 엄마!”
나는 잠시 상상 속에 빠져 있다 현실로 급하게 복귀한다. 상상 속 미녀는 사라졌다. 표정이 험악해진 아이 둘의 손을 양쪽에 하나씩 붙잡고 있는 나는 비를 맞고 있는 길 잃은 아줌마였다. 슬프게도 영화처럼 아름다운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엄마. 빨리 택시 불러. 여기 너무 싫어”
나는 머리를 흔들며 허둥지둥 그랩을 부르고 우리들은 다시 힐튼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스미글에서 데려온 물건들을 아가라고 부르며 침대에 늘어놓고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나는 변기 위에서 맛사지를 받는 그 곳에 한번 더 갈까 생각하다가 지루한 책을 몇 장 넘기며 보는둥 마는둥 하다 잠이 들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바깥에서 요란하게 폭탄이 터지며 창 밖에 섬광이 번쩍였다.
깊은 밤이었고 아이들과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14화에 계속>
윤혜영 프로필 ▶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남 통영 출생. 계간 ‘문학나무(발행인 황충상 소설가)’겨울호를 통해 신인문학상 중 수필 부문 수상자로 등단. 주요 저서로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화가들이 만난 앙코르와트’ 외 항공사와 증권사, 신문사 및 문화예술지 등 다수에 문화칼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