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9)] K-스포츠와 민족주의③ 박정희 시대 “체력은 국력이다”
민병두 입력 : 2024.07.21 09:30 ㅣ 수정 : 2024.07.21 09:30
박정희 시대의 스포츠=한일대결이라는 민족주의, 남북대결이라는 국가주의 두 축으로 진행 역도산을 모델로 삼은 박정희의 김일 마케팅은 성공, 집단 최면과 이미지를 적극 활용
국회 정무위원장을 지낸 3선 국회의원 출신 민병두 보험연수원장이 한국인에 대한 예리하고도 심층적인 분석을 담은 '민병두의 K-Sapience'를 연재합니다. 문화일보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으로 필력을 떨쳤던 언론인이기도 한 민 원장은 K컬처와 K푸드로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한국인을 'K-Sapience'라고 규정하고 그 내밀한 세계를 종횡무진 그려낼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박정희 시대의 스포츠는 한·일대결이라는 민족주의, 남북대결이라는 국가주의 두 축으로 진행했다. 시작은 순조로왔다. 민정이양 대통령선거(1963.10.15)를 앞둔 시점에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4월민주혁명을 무위로 돌린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라며 쿠테타를 정당화했고, 학생들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으로 대응했다. '한·일국교정상화'가 정치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였다. 미국은 일본을 축으로 한 아시아 방위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한·일국교정상화를 압박했고, 국민은 굴욕외교는 안된다며 맞서고 있었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최초의 한·일야구전이 열렸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야구는 일본이 늘 한 수 위였으며 대적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었다. 야구는 일본의 국기였고 축구는 조선의 스포츠였다.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재일동포 선수를 포함한 한국대표선수단이 1차전(9.25)에서 5대2, 2차전(9.29)에서 3대0으로 이기고 우승했다. 나라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였다. 경향신문은 호외를 발간한 데 이어 1면 머릿기사로 “한국 야구 아시아를 제패, 58년래(來에) 처음...이날 서울운동장에는 2만5천명의 관중이 모였으며 4번타자 김응용 군이 1백15미터의 ‘호므런’을 날려 승리를 결정지었을 때는 오래도록 환성과 박수가 넓은 운동장...”라고 보도했다.
대회 우승의 주역 김응용은 “일본과의 경기 전 날, 감독이 찾아와 일본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당부를 하고 나가는데 선수단 분위기가 아주 엄숙했다”고 밝혔다. 훗날 국가대표 감독이 된 김응용은 ”모든 팀에 다 이겨도 일본에 지면 전패고, 다른 나라에 다 져도 일본에 이기면 전승“이라고 했는데 한·일전에 나가는 선수들의 심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해 두고두고 회자했다.
박정희 대통령 후보는 폐회식이 끝나자 마자 서울운동장 근처에 있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으로 선수들을 불렀다. 선거운동에 큰 덕을 본 듯했다. “지금처럼 나라가 괴로운 때에 희망의 빛을 주어 국민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른다.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다. 세계여행도 좋다”며 기뻐했다. 선수들의 소망대로 1966년 9월 30일 서울운동장에 야간경기가 가능하도록 조명탑이 만들어졌다.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승부수를 던졌다. 2차대전의 주축국가 일본은 올림픽을 통해 평화 이미지를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키고, 메달 집계 종합 3위를 달성했다. 여전히 최빈국이었던 한국은 16개 종목 224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했는데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로 종합26위에 그쳤다. 정권의 기대에 크게 못미쳤다. 일본과의 격차는 크게 다가왔다. 영광스런 민족의 미래를 앞당겨 보여주고자 했지만, 승부는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우리나라가 미국에는 50년 이상, 일본에는 30년 이상 뒤쳐졌다는 열패감이 전염병처럼 번져있었던 시대였다. 이른바 엽전의식이었다.
“체력은 국력”이라며 스포츠에 많은 비중을 두었던 박정희는 돌파구를 찾는다. 단기간 내에 세계를 제패하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는 스포츠 이벤트의 모색. 바로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이었다.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영웅을 만들어야 했다. 영웅을 통해 패배의식에서 탈출하고자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선수를 배출하기 위해 체계적인 투자를 하는 일이었다. 메달의 수는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앞서는 척도라고 간주했다.
박정희는 역도산을 모델로 삼았다. 패전국 일본의 경제부흥이 역도산의 신화와 행보를 같이하며 진화하는 과정을 주의 깊게 보았다. 일본에서 스모 선수로 입문했다가 실패한 역도산은 미국에서 레슬링을 연마한 후 돌아와 1954년 일본 최초의 국제프로레슬링 경기를 열었다. 역도산의 주 특기인 가라테 촙으로 2m 크기의 미국인을 무너트릴 때 환호와 탄성이 터져나왔다. 일본에서 TV 방송이 시작된 지 6개월. 전국의 길거리 전파상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신바시역 광장에 설치된 수상기 앞에는 2만여명이 운집했다. 2차대전으로 패전국가가 된 일본인들에게 역도산은 영웅이었다.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전범국가이면서도 원자폭탄 투하와 도쿄 대공습으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일본인들은 역도산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풀었다. 일본인 중에 아주 극소수가 역도산이 한국인인 줄 알았지만 일본인들이 그에게 너무 매료가 되어 있어서 차마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노도의 사나이’ 역도산 전기영화 1955년) 역도산은 휴전선을 방문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향해 눈물을 보인 뒤 1963년 39살에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다. 일본으로 밀항해 수감되어 있었던 김일은 1957년 역도산의 도움으로 풀려나 첫 번째 문하생 중에 하나가 되었다.
1964년 가을 중앙정보부 요원이 일본으로 파견돼 김일을 접촉했다. 그는 일본에서 링에 오른지 7년만에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를 영웅으로 만들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은 1963년 2월에 개장했다. 여기에서 1965년 프로레슬링의 한국인 세계 챔피언이 탄생했다. 일본 콤플렉스를 씻어주었다.
“내가 일본에서 맹활약을 펼치자 한국의 언론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말쑥한 정장 차림의 한국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한국 중앙정보부 소속 요원이었다. 1964년 6월 중순으로 기억된다. 그는 다짜고짜 한국에 올 수 없느냐며 고국 방문 의향을 타진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당신은 유명하다. 각하께서도 당신의 활약상을 너무도 잘알고 있다. 한국에서도 프로레슬링경기를 보여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한국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면서 왜 정부가 나의 귀국을 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태평양 전쟁 후인 1950-1960년대 초반에 스승 역도산은 거구의 미국 선수들을 쓰러뜨리며 패전 후 일본인의 미국 컴플렉스를 후련하게 씻어줬다. 한국 정부도 나에게 스승과 같은 구실을 기대했던 것 같았다.'(김일 회고록, '굿바이 김일')
춥고 배고프던 시절 김일은 국민에게 희망과 위안을 준 초인 같은 존재였다. 그는 정의의 화신이었다. 그는 민족적 상징을 가운에 새기고 등장했다. 김일은 국민과 호흡할 줄 알았다. 호랑이와 갓, 대나무, 곰방대 등 전통문양이 새겨진 가운을 걸쳐 입었다. 김일이 나타나면 TV·라디오 앞에 모인 팬들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당시 TV 수상기 보급률은 1970년 기준, 5%도 안되었다. 다방이나 만화가게, 전파사 앞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10원을 내면 만화 5권을 보던 시대인데 김일 경기가 있는 날은 꼬맹이들이 진을 쳤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장충체육관입니다. 지금부터 대한의 건아, 화랑의 아들 김일 선수의 인터내셔널 헤비급챔피언 타이틀매치를 중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뜨거운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흐르는 순간 국민들의 눈과 귀는 일제히 TV와 라디오로 쏠렸다. 아나운서가 흥분을 한 건지, 아니면 시청자를 흥분시키기 위한 것인지 늘 “고국에 계신...”으로 시작했다. 조국에 있으면서.
김일은 쉽게 이기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삶과 같았다. 온갖 반칙에 피를 흘렸다. 심판의 무관심과 편파적 진행에 관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다. 김일은 바닥에 쓰러져 있고, 심판이 몇 번이고 원 투 스....를 외칠 때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다. 관중은 목놓아 ‘박치기’를 외친다. 김일을 연호한다. 드디어 김일이 일어선다. 반격이 시작된다. 한쪽 다리를 들어 반동하듯 원을 그린 뒤 몸을 날려 가격하는 미사일급 박치기에 금발의 거구는 맥없이 나동그라진다. 일본선수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찢겨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흰 수건으로 지혈한다. 심판은 김일의 팔을 번쩍 들어올린다. 관중은 미친 듯이 열광한다. 국민은 마음에 쌓인 울분과 근심을 훌훌 날려버렸다. 우리 국민의 속을 이처럼 시원하게 뚫어준 사이다가 일찍이 없었다. 최고봉이었다. 독보적이었다. 세상에 어떤 드라마 보다 짜릿했다. 장충체육관은 매주 인파로 미어터졌다. 경기가 끝나고 박정희는 김일을 전화로 연결해 “조국의 명예를 빛내줘서 고맙다”라고 격려했다. 중요한 마무리 의식이었다. 김일은 각하에게 '대한남아'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며 겸손해 했다.
프로 레슬링은 처음엔 프로 복싱처럼 랭킹을 매길 정도로 진지한 스포츠였다. 미국 암흑가의 개입 이후 담합 경기가 생겼고, 실력 있는 레슬러를 고용해 인기와 타이틀을 몰아주는 과정을 거치면서 약속 대련, 약속 드라마 처음 보였다. 사전 약속에 따라 진행을 해도, 관중을 흥분시킬 만한 실력이 없이는 다이내믹한 동작 구현이 불가능하다. 다시말해 실력이 있어야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절반은 각본, 절반은 진짜라고 할 수 있었다.
역도산은 일본 유도선수권을 10년 간 제패한 기무라가 레슬링이 쇼라고 하자 진검승부를 제안했다. 가라테 촙으로 그를 가격하여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시켰다. 김일도 라이벌인 장영철의 유사한 폭로에 부딪혔으나 장영철 스스로가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국민은 김일을 계속하여 사랑했다.김일은 훗날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됐다.
박정희의 김일 마케팅은 성공했다. 레슬링이 범국민적 스포츠로 성장하는 데는 박정희의 공이 컸다. 박정희는 스포츠가 지닌 집단 최면과 이미지를 적극 이용했다. 뒤를 이은 전두환은 프로씨름을 선호했다. 박정희는 프로복싱도 적극 활용했다. 한국 최초의 프로 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를 만들었다. 1966년 북한이 월드컵에서 이태리를 격파했을 때, 김기수는 1966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16주년이 되는 날,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태리의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승으로 꺾고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내 주먹을 사라’는 영화에서 김기수는 실제 주연을 맡았다.
4전5기의 신화, 홍수환은 이날 경기를 보며 세계챔피언의 꿈을 키웠다. 가난한 이들의 경기인 권투에서 유제두 홍수환 염동균 김겅준 박찬희 등 잇달아 참피언을 배출하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한국인들도 엽전의식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