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영 전문기자 입력 : 2024.08.06 15:41 ㅣ 수정 : 2024.08.06 15:41
레부숑에 온 목적은 코리요리 때문...2코스 세트는 38링깃, 3코스 세트는 55링깃으로 호객 강력한 에어컨을 못 견디고 실외로 옮긴 게 패착, 땡볕에서 음식도 제대로 못먹고 철수 2인 코스요리 체험 가격은 2만6000원, 다음에는 외투 입고 실내에서 제대로 먹기로 결심
[뉴스투데이=윤혜영 전문기자] 여명이 시작되었다.
해는 저 멀리 산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빛을 발산하며 아직 잉크빛인 대기를 코발트 블루로 서서히 물들인다. 오렌지빛이 푸른빛을 침범하며 점진적으로 확산해가다가 어느 순간 가열차게 황금빛을 흩뿌린다. 하늘은 밀 익는 들판과 같은 풍성한 금빛으로 뒤바뀐다. 해는 이윽고 둥실 떠올라 구름 뒤로 사라진다.
한 달의 주어진 시간 동안 매일 아침 이 광경을 바라보며 잠이 깨는 것은 여행이 주는 뜻밖의 보너스이다. 욕실에 뜨거운 물을 받아 반신욕을 하는 것도 조호바루에 와서 들인 습관이다. 약간의 땀을 흘린후 찬물로 마무리 하면 기분이 굉장히 신선하여 인간 레몬으로 환생한 기분이다.
냉장고를 뒤져 아침식사 준비를 했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번잡한 조식당에 가지 않고 과일로 가볍게 식사를 떼우기도 한다.
망고를 잘라 요거트를 뿌리고 반숙으로 삶은 달걀의 껍질을 벗긴다. 식빵 위에 버터를 바르고 세 종류의 카야쨈을 골고루 바른다. 조호바루는 카야쨈이 다양해서 좋다. 마트에 가면 저렴한 가격에 여러 회사에서 내놓는 카야쨈을 고르는 재미가 좋다. 선택의 범위가 폭 넓다.
어느날은 상표의 디자인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구매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성분표를 꼼꼼히 보고 당류가 가장 적게 들어간 제품을 고르기도 한다. (설탕에 이렇게 민감하면서 과자나 빵을 물보다 자주 섭취하는 아이러니라니!)
여하튼 햇살이 너무 즉각적으로 들이치게 때문에 늦잠을 자기 힘든 집의 구조상 기상 시간은 늘 일출과 때를 같이 했다. 아이들도 농사꾼처럼 해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이 드는 루틴을 가지게 되었다.
큰 아이가 어학원에 가고 나면 오전 시간이 텅 비게 된다. 둘째 아이와 마트를 가거나 Book x-cess 서점에 가거나 숙소 수영장에 가서 음악을 들으며 빈둥거린다. 주로 펫 샵 보이스를 듣는다.
둘이서 가볍고 저렴한 현지 식당에 가서 점심을 사 먹고 큰 아이가 하원하면 다함께 레고랜드에 간다. 우리의 일상은 대체로 이 범주를 충실히 따랐다.
오늘은 둘째 아이와 둘이서만 프렌치 레스토랑 Les bouchons에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큰아이에게는 비밀로 했다) 조호바루에서 프랑스 요리라니! 뭔가 멋지지 않은가.
격식에 맞게 헤메코(헤어, 메이크업, 코디)를 다른날보다 신경썼다. 그래봤자 Cotton on에서 산 반바지와 보라색 신발, 무스타파에서 구매한 티셔츠 중에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걸로 갖춰 입었다.
아이도 머라이언이 프린트 된 티셔츠를 입었다. (역시 싱가포르 무스타파는 없는게 없다)
나름 포멀하게 단장한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자동차가 한 대도 달리지 않는 도로를 무단횡단해 티가 레지던스 상가동에 위치한 레부숑에 도착했다.
프레쉬 마트 2층에 위치한 레부숑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체인형 레스토랑이다. 40대로 보이는 사복 차림의 통통한 아저씨가 건치 미소를 띄며 상냥하게 맞이해 주었다.
정면에 빨간색 긴 의자를 배치하고 장식을 절제하여 모던하게 디자인한 인테리어는 롯데리아 햄버거의 상위 버전 같았다.
빨간색 의자에 궁둥이를 내려놓자마자 메뉴판과 함께 얼음이 동동 뜬 물을 가져다 주었다. 해외에서는 절대로 얼음이나 무료로 제공되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 동남아에서 두 번 정도 장염에 걸려 토사곽란의 밤을 보낸 이후로 절대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원칙이다.
우리가 레부숑에 온 목적은 월요일부터 일요일 12~3시 사이에 판매하는 코스요리 때문이었다. 2코스 세트는 38링깃, 3코스 세트는 55링깃의 믿기지 않는 가격으로 파격적인 호객을 하는 중이었다.
앙트레는 쿠스쿠스 샐러드나 구운 달팽이 요리(10링깃 추가), 그리고 차가운 양파 수프, 메인 요리는 티본 스테이크나 연어, 양고기, 블랙 앵거스 셜로인과 구운 닭다리 중에 선택이었다. 후식으로 초코 무스와 셔벗이 포함되었다.
아이는 구운 닭다리, 나는 연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한 통통한 남자가 건치 미소를 날리며 달려와 주문을 받고 주방에 오더를 넣고 생수를 날라다 주었다.
실내에는 우리 외에는 손님이 없었고 남자는 웨이터와 캐셔, 관리자의 세 가지 임무를 혼자서 수행하고 있었다.
식전빵으로 치아바타와 양파수프가 나왔다. 그런데 에어컨이 너무 강력하게 틀어져 있어 한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빵을 뜯어 수프에 찍는데 알콜중독자처럼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더위에 강하고 추위에 약하다. 에어컨을 약하게 틀어주라고 요구를 하면 앞에서는 웃으면서 뒤에서는 K맘충이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아이도 춥다고 짜증을 부렸다.
우리는 실외에 위치한 자리로 옮기자고 합의를 본 후 빵과 물컵을 들고 바깥으로 이동했다. 남자가 웁쓰하며 달려오더니 양파 수프를 옮겨주었다.
바깥에 위치한 자리는 2층 복도에 등나무 의자와 테이블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건물을 가운데 두고 학익진처럼 빙 둘러서 배치한 형식이었다. 파리의 노천까페 처럼 패피들이 오고가는 활기찬 분위기는 아니었고 텅 빈 복도에는 음식물 부스러기를 주워먹기 위해 커다란 까마귀들만 날아왔다가 도망쳤다가 분주했다.
전망이랄게 없었다. 코로나 사태로 텅 비어 유령도시로 불리는 조호바루의 한낮의 거리는 개 한마리 오가지 않았다. 그나저나 야외석으로 옮긴지 1분도 되지 않아 우리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정오의 태양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성급한 판단이었다.
바람을 피해 불로 뛰쳐들어가다니! 동남아의 태양은 피 한방울 남김없이 말려버리겠다는 기세로 구석구석 빠짐없이 맹렬하게 내리쬐었다. 샐러드를 먹는둥 마는둥 했다. 잠시 후 이마에 맺힌 땀이 양파 수프 안으로 똑똑 떨어졌다. 메인 요리가 나올 즈음에는 식도까지 바싹 말라 포크를 들 기운도 없었다.
다시 실내로 들어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접시가 깔린 후였다. 우리는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수북하게 쌓인 감자튀김은 불붙은 성냥개비 같았다. 내 다리인지 닭다리인지를 헷갈려 하며 남은 힘을 쥐어짰다.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 초코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계산을 하러 가자 웨이터와 캐셔, 관리자를 겸하는 남성이 재빠르게 다가와 접객용 미소를 펼치며 음식은 어땠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뻔뻔하게 “Excellent”라고 답했고, 우리는 허공에 눈알을 둔 채로 멋쩍게 웃었다.
‘너도 봤지? 응, 나도 봤어, 그러게 얌전히 먹지 왜 네 멋대로 땡볕에 기어나가고 염병을 떠니’ 그와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채 묵언의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계산은 83.60RM 한화 2만6000원. "땡볕에서 코스 요리 먹어보기" 2인의 체험 가격이었다. 숙소에 들어와 찬물을 몇 번 끼얹고 카야 토스트를 후딱 만들어서 다시 점심을 먹었다. 다음에는 큰 아이도 데리고 가서 외투를 입고 실내에 앉아 음식을 제대로 먹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28화에 계속>
윤혜영 프로필 ▶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남 통영 출생. 계간 ‘문학나무(발행인 황충상 소설가)’겨울호를 통해 신인문학상 중 수필 부문 수상자로 등단. 주요 저서로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화가들이 만난 앙코르와트’ 외 항공사와 증권사, 신문사 및 문화예술지 등 다수에 문화칼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