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적 소비와 모방적 소비 그 언저리에서
[뉴스투데이=윤혜영 전문기자] 조호바루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브랜드가 많다. 아마도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가 가까운 문화권이다 보니 그런듯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학용품 브랜드인 스미글, Cotton on, Native 등등과 약국에도 오스트레일리아 브랜드가 많았다.
언제나 손님보다 종업원이 더 많은 조호바루 내 쇼핑몰에서 자주 들르는 곳은 Cotton on과 라벤더 베이커리이다. 나는 주로 미드밸리, 패러다임, 시티 스퀘어 등등을 무작위로 돌아다니는데 Cotton on에는 합리적인 가격대의 의류가 많아서 쇼핑하기 좋고, 라벤더 베이커리는 체인점 빵집인데 착한 가격에 맛도 좋아서 픽업이나 그랩배달로 애용하는는 품목이다. (일주일에 서너번은 시키는데 식빵과 페이스트리 류가 맛있다)
두 곳 모두 가성비와 가심비를 아우르는 곳이라고나 할까. 내가 체류할 당시에는 K-POP의 인기가 뜨거워서 Cotton on에는 블랙핑크 티셔츠가 잘 팔리는 아이템이었고, 식료품 마트에서는 블랙핑크 멤버의 얼굴이 인쇄된 오레오 쿠키가 인기였다.
당연히 우리집 어린이들도 블랙핑크를 좋아하였기에 조공용으로 Cotton on에 블랙핑크 티쳐츠를 사러 갔다. 큰아이가 하원하길 기다렸다가 만나서 그랩을 타고 패러다임 몰로 향했다.
패러다임 몰은 Cotton on뿐 아니라 스미글과 스타벅스도 있어서 나와 아이의 니즈를 모두 만족하는 곳이다. 한국에서는 어쩌다 얻어걸리는 기프티콘 소진을 위해 가끔 가는 스타벅스였지만 조호바루에서는 커피 원두를 사기 위해 자주 방문했다.
조호바루는 의외로 원두 불모지였다. 대형마트에 가도 원두의 종류가 많지 않아서 고를 수 있는 품목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프레쉬 마트나 nsk 등등을 여러번 훑어도 아라비카 종의 원두커피에 코너를 할애하지 않는것을 알 수 있다. 대신 분말로 만든 로부스터 커피는 매우 다양했다.
케냐 피베리나 파나마 게이샤를 바란것도 아니고, 적당한 가격대의 보통의 원두를 구하고 싶은데 예상과 달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커피 수준이 높아서 비슷할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불찰이었다. 결국은 한국 물가와 비슷한 스타벅스에 가서 원두를 구입하게 되었다.
오늘은 원두를 사고 블랙핑크 티셔츠를 사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랩으로 15분을 달려 패러다임 몰에 도착했다. 입구의 오른쪽에 위치한 스타벅스에 가서 원두를 구입하고 아메리카노를 한 잔 구입하여 긴급히 커피수혈을 받았다.
그리고 몰의 안쪽으로 걸어가는데, 아이들은 저 멀리 보이는 스미글의 로고에 흥분하여 양을 쫓는 늑대처럼 잽싸게 달려가버렸다. 나 홀로 Cotton on에 들어가 옷을 둘러보다가 발견했다. 영롱한 자태의 발렌시아가 크록스를!
얼마전 잡지에서 명품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광고를 보다가 투박한 PVC 재질의 고무장화를 보았는데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가 크록스와 콜라보레이션한 풋웨어였다.
학교나 식당의 급식실에서 이모님들이 즐겨있는 플라스틱 슬리퍼, 이른바 ‘딸딸이’로 불리우는 딱 그만큼의 품격, 만원 이상의 가치는 절대 갖추지 않은 그 신발이 무려 백만원 이상이었다.
‘저런걸 누가 신어, 벼락부자들의 돈지랄이지’라며 마음껏 비웃었던 과거의 나. 그런데 매대에 올려져 있는 영롱한 핑크빛의 발렌시아가 크록스를 보고는 자석처럼 이끌렸다. (진품은 아니었지만 매우 흡사한 디자인이었다)
내 손바닥 위에는 어느새 신발이 올려져 있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가격표를 확인했는데 한화 만원에 조금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어머! 이건 꼭 사야 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0을 한 개 못본건 아닌지 재차 확인하며 혹여 내 발에 맞는 싸이즈가 없을까 걱정하며 계산대로 달려갔다. 돈을 치르고는 ‘신고 갈께요’ 하며 신발을 신었다. 통굽이라 조금의 키높이 효과도 있는 신발은 나를 위한 맞춤인 듯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하나를 더 사야 되지 않을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가까우니까 또 오지 뭐, 라며 아이들이 있는 스미글로 걸어갔다. 발렌시아가 크록스를 신고 도도하게 걸어가는 나.
캣워크를 가로지르는 모델이 된 느낌이었다. 턱을 치켜들고 스미글로 워킹했다. 사람들이 유독 나를 바라보는 느낌 아닌 느낌이었다.
‘연예인의 삶이란 이런거구나. 훗’하고 웃으며 스미글의 출입문을 가볍게 빙글 돌아 우아하게 입장하는 나. 아이들은 해리포터 주인공들이 그려진 필통과 가방을 주무르고 있었다.
프런트에서 나를 바라보는 말레이시안 남자의 뜨거운 눈길을 즐기며 “골랐어?” 라고 말했다. 만수르가 된 이 기분, 오늘은 조금 비싸도 너그럽게 사줄수 있을 것 같았다. 큰 애가 조금 머뭇거리며 “엄마, 해리포터 헤드폰 사면 안돼?” 라고 물어보았다.
며칠전 방문 때 아이가 집어들길래 다이소에 가면 똑같은 헤드폰 많다고, 해리포터 캐릭터만 그려서 비싸게 팔아먹는 상술에 기만당하면 안된다며 빼앗았던 제품이었다. “그래, 사”
나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엄마로 빙의해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잘못들은 듯 깜짝 놀라더니 내 마음이 바뀔까봐 신속하게 계산대로 달려갔다. 계산을 치른 후 아이들을 이끌고 또 다시 쇼핑몰의 복도에서 캣워킹을 하는 나.
그때 나의 귓전에 들려오는 목소리. “엄마, 그 신발 어디서 났어? 할머니도 밭에 갈 때 똑같은 거 신던데”
왼발과 오른발을 교차시켜 가며 워킹에 열중하던 나는 충격을 받고 멈춰섰다. “어머머, 너 왜 그래? 이거 발렌시아가에서 나온 엄청 비싼 신발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김이 팍 새버렸다. 시어머니가 밭에 갈 때와 근방에 마실 갈 때 늘 신던 ‘뿔 딸딸이’가 오버랩 되었다. (여기서 ‘뿔’은 플라스틱을 의미하는 경상도 할매들의 지역 방언이다)
내 눈에는 디자이너의 명품 슈즈였지만 아이의 순수한 눈으로 바라본 신발은 제 할머니와 동네 할머니들이 즐겨 신는 고무 딸딸이였던 것이다.
과시적 소비는 꿈도 못 꾸는 나의 모방적 소비는 곧 누추해졌다. 평상시처럼 다시 구석으로 가서 조용히 걸어가는 나. 그래도 신발은 꽤 편해서 조호바루에 있는 동안 내 발에서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우리들은 라벤더 빵집으로 가서 단돈 30링깃에 비닐봉지 한가득 맛있는 빵을 사고 만원의 행복을누렸다. 과시적 소비도, 모방적 소비도 찰라의 기쁨만 가져다줄 뿐 합리적인 소비의 넉넉한 만족에는 비할 수 없다. <29화에 계속>
윤혜영 프로필 ▶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남 통영 출생. 계간 ‘문학나무(발행인 황충상 소설가)’겨울호를 통해 신인문학상 중 수필 부문 수상자로 등단. 주요 저서로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화가들이 만난 앙코르와트’ 외 항공사와 증권사, 신문사 및 문화예술지 등 다수에 문화칼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