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영 전문기자 입력 : 2024.08.27 06:15 ㅣ 수정 : 2024.08.27 06:15
히잡과 차도르에 가려진 이슬람 문화는 늘 비밀스러워...이슬람 사원을 마음먹고 방문 입구에서 빌려주는 '히잡'을 착용하고 내부로 입장...기도실은 출입제한이라 못 들어가 아이들을 달래면서 걸어간 사원 인근의 '조호바루 동물원', 'Close' 팻말만 걸려 있어
[뉴스투데이=윤혜영 전문기자] 얼마전 오스트리아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테일러 스위프트의 콘서트가 이슬람 과격단체 ISIS의 테러계획 발각으로 중단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용의자는 19세 소년을 비롯한 10대 청소년들이었다.
이들은 수월한 진행을 위해 공연장 직원으로 미리 취직하고 폭발물을 준비하는등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종교적 신념으로 파생된 테러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먼 과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분쟁들이 우리의 현대사를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쓸모를 통해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자신이 강하고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지만 에너지를 분출할 건설적인 배출구를 찾을 의지나 능력이 없는 젊은 남자들을 자극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다는 슬픈 현실도 있죠. 테스토스테론에 의한 독살인 셈이에요.”
이는 SF 소설을 통해 인종차별과 공존, 사회 문제를 발언해 온 옥타비아 버틀러의 발언이다. 나의 이십대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평생을 나의 ‘쓰임새’를 찾으며 살아왔고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한때는 노트에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卽生 倖生卽死)라고 노트에 끼적거려 놓기도 했다.
지금에야 부끄럽기 짝이 없는 과거이지만 그때는 젊었으니까. 호르몬이 요동치는 시절에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비장미의 극치라며 오글거리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체 게바라를 탐닉했고 허 샤오시엔의 영화에 매료되어 대만 228공원에 찾아가기도 했다. 시대를 거슬러 태어났으면 독립군에 몸 바쳤을 거리고 공상하던 어리석고 낭만적이던 젊은 시절.
나는 늘 궁금했다. 히틀러나 폴 포트, 사담 후세인 같은 압제자들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인구의 60%가 국교인 이슬람교를 믿는 말레이시아의 거리에서는 사원의 모스크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기상의 알람은 시계보다 아잔이 우선한다.
히잡과 차도르의 장막 뒤에 가려진 그들의 문화는 늘 비밀스러웠다. 그랩을 타고 오가다가 늘 궁금하던 이슬람 사원을 오늘은 마음 먹고 방문해보았다.
목적지인 구도심의 술탄 아부바카르 모스크는 1892년에 착공하여 1900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Jalan Gertak Merah, Masjid Sultan Abu Bakar의 주소를 찍고 푸테리 하버에서 출발하여 차로 약 25분을 달려 도착했다. 사원은 고지대에 자리하여 도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마치 알라의 권위를 과시하듯이.
그러나 연노랑의 건물에 진한 파랑의 지붕을 얹은 외양은 산뜻하고 깨끗하여 고급진 기숙학교나 대형 쇼핑몰 같은 느낌이었다. 최근에 지어진듯 세월의 흔적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외벽의 칠은 까진곳이 없었고 구석진 곳에도 쓰레기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관광객들은 없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의 자연과 함께 쇠락한 아름다운 폐허의 느낌이나, 프랑스 노트르담 성당처럼 웅장하면서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경건한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아름다운 건축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혹적이지만 시간이 더해지면서 함축된 아우라와 스토리를 덧입는다. 완벽하게 현대적인 보수를 거듭한 이 건물에서는 역사의 그 어떤 히스토리도 발견할 수 없었다.
건물 내부로 이어지는 입구는 모두 잠겨 있었다. 출입금지의 표지판으로 폐쇄된 내부는 속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린 말레이시안 가족들 한 무리가 우루루 출입구로 달려가더니 안쪽으로 사라졌다.
우리들은 염탐하는 도둑들처럼 건물의 외부만 슬슬 돌아보다가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니캅을 쓴 이슬람 여인들처럼 그들은 우리를 볼 수 있어도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다. 폐쇄적인 이슬람 사회의 한 단면을 본 것 같다.
물론 신자들은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며, 외부인 출입이 허용되는 사원도 많다. (복장 제한은 따른다) 수년전에 외국인 출입이 허용된 코타키나발루의 이슬람 사원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여성은 히잡을 써야 했다. 나는 입구에서 빌려주는 히잡을 착용하고 내부로 들어갔다. 하얀색의 건물은 푸른색 지붕을 얹고 있었고 내부에는 이슬람 신자로 보이는 남성들이 무릎 아래 조그만 양탄자를 깔아놓고 촘촘히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기도실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민중에게 종교는 아편과 같다고 했든가. 그들이 이곳에서 얻으려는 것은 망각인가 희망인가. 무신론자인 나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우리 셋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따로 또 같이‘ 각자의 사념에 빠졌다. 나는 물론 또 다른 계획이 있었다. 바로 조호바루 동물원.
그것도 사원 인근에 자리하고 있어 그랩을 호출할 필요도 없었다. 노인보다 더 걷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설득시켜 동물원으로 향했다. 얼굴 가득 짜증이 파도치는 아이들에게 “여기 동남아시아 최초로 지은 전통있는 동물원이래. 사자도 있고 하마도 있어.”라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무거운 몸에 어울리지 않게 발랄할 걸음걸이로 깡충깡충 뛰듯이 걸으며 경쾌한 분위기를 유도하는 나. 끈적한 무더위로 겨터파크에서 흐르는 땀이 암홀 주변을 축축히 물들였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욕이 나왔다. 곧 이어 쿰쿰한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이건 내 겨드랑이의 암내가 아니라 짐승의 체취였다. 동물원 근처에 도달했다는 알림이었다.
“얘들아. 동물원이야!” 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앞장서 달려갔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어? 이게 왜 이러지? 오늘 문 닫는다는 말 없었는데”
나는 Close라고 걸린 팻말을 뒤집으면서 문을 마구 흔들어 보았다. 그러고보니 주변에는 사람 하나 없었고 우리뿐이었다.
경비원 한 명 지키지 않는 건물은 고고한 적막에 잠겨 있었고 멀리서 꾸르르르. 같은 짐승의 소리만 이따금씩 들려왔다. 나는 일그러진 아이들의 얼굴을 대면하기가 두려워 문을 몇 번 더 문을 흔들어보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지. 내가 오니까 문을 닫은거야. 썅‘
나에게는 이런 소소한 불행들이 흔하다. 교통신호는 매번 내 앞에서 노란불로 바뀌고, 맛집을 찾아가면 정기휴일이다. 몇 달 만에 세차를 하면 다음날 어김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내가 여행을 갈 때면 해당 국가의 환율이 폭등한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때마침 사원에서 구슬픈 아잔의 기도소리가 울려퍼지며 다운된 기분을 한층 더 가라앉게 했다.
오랜 침묵 후.
“맛있는거나 먹으러 갈까?”
이에 굳어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 말랑해졌다. 나는 그랩을 켜서 Sedap Corner를 입력하고 호출을 눌렀다. 다행히 식당과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30화에 계속>
윤혜영 프로필 ▶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남 통영 출생. 계간 ‘문학나무(발행인 황충상 소설가)’겨울호를 통해 신인문학상 중 수필 부문 수상자로 등단. 주요 저서로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화가들이 만난 앙코르와트’ 외 항공사와 증권사, 신문사 및 문화예술지 등 다수에 문화칼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