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32)]한국의 개신교 보수화② 이승만과 개신교

민병두 입력 : 2024.09.24 08:30 ㅣ 수정 : 2024.09.24 08:30

유학가문에서 자란 이승만, 기독교 국가 건설을 일생의 목표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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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6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9주년 기념식일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이승만(1875~1965)은  유학가문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자였다. 영어를 배우려고 1895년 배재학당애 입학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접했다.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기독교로 개종을 했고 기독교 국가 건설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했다. 프린스턴대학은 당시에는 복음주의, 기독교 보수주의의 산실이었다. 그는 미국 생활을 하면서 기독교 국가 건설 꿈을 점점 구체화 하였다.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 및 한인 YMCA를 창설하여 교포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미국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미국의 건국이념과 제도를  따른 ‘형제 공화국’의 건설이라고 선전했다. 1919년부터 한국을 동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고 알렸던 것이다. 

 

이승만은 해방 후 귀국하여 1945년 11월 한 연설에서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튼튼한 반석 위에다 세우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매진합시다”라고 했다. 이어 1946년 3·1절 기념식에서는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하에 영원한 자유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총선거는 원래 5월9일 일요일로 정해졌으나 개신교에서 주일날에 선거를 할 수 없다고 미군정을 설득하여 월요일인 5월10일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1948년 5월27일 국회의원 예비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됐는데, ‘하나님과 순국선열과 3000만 동포 앞에 삼가 선서함’이란 제목의 선서문을 채택했다. 5월31일  제헌국회 제1차 회의는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등단하여 전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의하고, 이윤영의원(목사)이 기도했다.”(속기록)

 

임시의장(이승만) :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나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 의원 기도 : (일동 기립) ”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국회가 처음 열린 날에 이승만 의장이 4번, 이윤영 목사가 12번(주님 1번, 예수 그리스도 1번 포함) 국회의원 전원에 의해 1번, 하지 중장에 의해 1번 하나님을 호명해서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의식이 되었다.  이승만은 그해 7월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며, “오늘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라고 밝혔다. 1950년 9월 서울을 수복하고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환도식에서 맥아더는 참석자들에게 기립할 것을 요구하고 주기도문을 바쳤다. 이승만은 해마다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하고 국회에서 성대한 성탄 파티가 열렸다. (강인철의 논문에서) 

 

국가의 주요 의례를 기독교식으로 행하고, 허리를 숙여 하는 국기에 대한 배례(경배)를 주목례(注目禮)로 대체하였다. 미 군정,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개신교에서는 “국기를 우상화했던 일본과 나치 독일은 패망했다”며 배례는 국기를 우상화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범 개신교의 의견으로 1950년 3월 반대서한이 이승만에게 전달되었고 그 해 4월 국무회의에서 국기를 주목하며 오른편 손을 왼편 가슴 심장 위에 대는 주목례로 바뀌었다.

 

이승만은 1954년 한국 최초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국과 1956년 극동방송국 설립에 특혜를 줘 선교 인프라의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방송은 1960년대 초반 이미 부산 광주 대구 등 전국 방송망을 갖추며 수십 년간 종교방송 시장을 독점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19개 부처 장을 역임한 153명 중 47.7%, 차관까지 포함한 242명 가운데 38%가, 국회의원 208명 가운데 약 21%가 개신교 교인이었다. 개신교는 1952년 8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실시하는 선거 때 마다 이승만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다. 가는 정과 오는 정이 돈독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때에도 서울 정동 감리교회에 출석했으며 1956년 명예장로로 추대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군종제도를 실시해 군선교를 하도록 했다.  부상 당하고 죽어가는 군인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군종에서 불교만 빠졌다. 기독교와 천주교만의 군종제는 엄청난 결과를 불러왔다. 군종제도가 실시되고 불과 3년만인 1954년 군장병의 종교 분포가 개신교 20%, 천주교 4%, 불교 6%, 유교 12%, 기타 7%, 무종교 51%로 나타났다. 1951년 부터 1967년까지 군종제도를 기독교가 독점한 결과는 오랜동안 지속되었다. 개신교 군종장교의 비율은 1997년에 66.7%, 2004년에 58.3%, 2018년 국방부 자료로는 총 492명 중애 258명으로 총 52.4%에 달했다.

 

강인철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정규 장교로 임명된 목사들로 군종장교단이 구성된 것은 미국의 피선교지 가운데 한국이 처음이었다. 전쟁 기간 중 17만 명에 달하는 공산군 포로 가운데 6만여 명이 한미 양국 목사들의 안수로 개신교 성도가 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기독교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낳았다. 미군정 당시 전체 인구의 2~3% 불과하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1941년 30여만명이던 개신교 신자수가 1950년 약 130만 명으로 늘어나 10년 사이에 4배의 성장을 보였다. 

 

이승만은 한국전쟁과 그 후 계속된 원조 물자 배분 과정에서 기독교계에 특혜를 주었다. 외국의 기독교 구호단체들이 보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 연합회(KNCC)를 통해 배분하도록 조치했는데 이는 기독교세를 급성장 시키는 물적 기반이 됐다. 교회에 가면 빵과 우유를 얻어먹을 수 있었고, 부활절과 성탄절에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찬송가 소리와 따듯한 죽 한 그릇은 사람들에게 없던 신심도 생기게 했다. 60대 이상 많은 이들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부활절 달걀과 성탄절 선물이 신앙을 갖게 된 계기였다고 말한다.

 

전쟁 직후 피난민이 260만 명, 이재민이 340만 명, 빈민이 430만 명 등 총 1000만 명이 구호의 대상자였다. 한국 정부나 민간단체는 재정이나 조직 면에서 감당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외국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다. 조직이 있는 기독교가 원조물자의 배분을 담당했다. 미국은 전체 구호물자의 대부분을 담당했고,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구원자로 비쳐졌다. 

 

미국은 일제에서 우리 민족을 독립시킨 해방자이고, 공산주의 침략에서 우리를 지켜준 수호자이고, 경제를 일으켜 준 구원자라는 인식은 한국 개신교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미국은 하나님이 선택하고 하나님이 임재한 국가이며, 그런 미국과 한미동맹을 맺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민의 신망을 잃은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과 반공주의를 이용해서 권력을 안정시켰다. 북한의 남침 위협은 이승만의 비타협적인 반공주의를 강화했고, 이승만이 미국을 압박해서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두었다. 미군이 인계철선이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단독정부 수립과 한미동맹을 주도한 이승만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이승만 국부 추대운동의 한 배경이 된다. 한국의 보수개신교가 신앙처럼 강조하는 친미 한미동맹 반북 반공의 가치관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미국과 함께 반공의 최전선에서 선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자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보수주의와 함께 정치적 보수주의도 이때 태통한다.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처음 사용됐다. 그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기존 질서가 거부당하자 “역사 속에서 쌓아 온 보존하고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확인된 가치들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근본적 변혁, 외과적 수술(surgical operation)을 꿈꾸는 진보주의와 대립하는 점진적 변화, 표면적 치료(cosmetic healing)의 보수주의가 탄생했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무엇을 지킨다는 토대 위헤서 시작을 하지 않고 무엇을 반대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자유 민주 공화 같은 가치는 원래 우리 보수의 것이 아니었고 체득되지 못했다. 우리가 보존하고 지켜야 할 가치라는 공감대와 경험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이 반공을 매개로 하여 독재로 치닫는 것을 제어하지 못했다. 한국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개신교 보수주의는 이렇게 불안정한 출발점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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