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요안 칼럼] 군사정보 입문(1) 정보사령부 소속 HID, 국가를 위해 목숨 거는 부대

정요안 정보관리전문기자 입력 : 2025.01.14 10:15 ㅣ 수정 : 2025.01.14 17:11

북한 도발에 대한 억지 전력으로 의미 있어…가치 있고 명예로운 일에 쓰이도록 관심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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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 사령관과 국군정보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한 정요안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이 군내 다양한 정보기관과 정보업무를 쉽게 풀어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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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6월 6일 현충일에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북파공작원 추모행사에서 유족들이 희생자 명단을 살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정요안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2.3 내란 사태와 관련해 북파공작원으로 알려진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가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 소속인 HID가 비상계엄 선포 전부터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의혹 때문이다.

 

북파공작원이란 한국전쟁 중인 1951년부터 휴전 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지역에 파견돼 활동한 무장첩보원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에 있던 빨치산처럼 북한의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양성됐다. 적 생포 및 사살, 적군 진지 주요시설물 파괴, 적지에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 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이 주요 임무였다. 

 

이들은 조선인민군 복장을 위장 착용하고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했고 미숫가루, 생식, 칡뿌리, 소나무 껍질을 주식으로 했다. 임무 수행 중 부상당하면 자결이나 자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작전에 투입돼 살아 돌아 온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북파공작원 보상을 위해 정부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951년 HID가 창설된 뒤 94년까지 양성된 북파공작원은 1만3000명이며, 임무 수행 중 7987명이 사망·실종됐다. 

 

HID, 정보사에서 특수작전 임무 수행하는 육상특임대 ‘설악개발단’ 지칭

 

HID는 북파공작원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과거 북파 작전을 수행했던 부대는 여럿 존재했다. HID의 전신은 1948년 1월 미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다. 이후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 안에 첩보수집을 담당하는 공작과가 신설됐는데, 이 부서가 영문자 HID로 표기됐다. 육군첩보부대가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한 기간은 1950년 7월부터 1961년 7월까지이다. 

 

이후는 HID라는 명칭이 육군정보부대(AIU: Army Intelligence Unit)로 변경됐다. 그러다가 1968년 1.21사태 이후 응징보복부대로 설악개발단을 비롯한 특수부대들이 여럿 창설됐는데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등 화해 분위기를 타고 폐쇄와 통폐합을 거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설악개발단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

 

1972년 AIU가 육군정보사령부(AIC: Army Intelligence Command)로 확대됐고, 1990년 11월 육군과 해군 등의 정보부대가 합쳐져 오늘날의 국군정보사령부(DIC: Defence Intelligence Command)가 만들어졌다. HID는 현재 정보사령부 산하에서 특수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육상특임대인 설악개발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50년 대 첩보전, 육군 정보국·방첩대와 미군의 켈로·동키 부대 등이 주축

 

대북공작대의 뿌리는 한국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10월 편성된 국방부 제4국은 대북공작과 한국군 내부로 침투한 북한 간첩을 잡던 곳이다. 그러나 국방부 4국은 1949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국 측의 요구로 해체됐다. 그리고 생겨난 것이 육군본부 정보국이며 48년 10월 터져 나온 여순반란 사건에 관여한 군내 좌익분자를 척결하면서 위상을 굳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군의 첩보 및 방첩 조직은 일시적으로 무너졌다. 이 시기 북한을 상대로 첩보공작을 벌인 것은 미 극동군 산하 한국인 첩보부대 KLO 2710이었다. 1949년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하며 한국(Korea)에 연락사무소(Liaison Office)를 두었는데 이것이 KLO다. KLO는 북한의 정보를 구하기 위해 이북에서 내려 온 한국인 청년들을 고용해 대북 첩보원으로 활용했는데 이들을 가리켜 속칭 ‘켈로(KLO) 부대’라고 했다. 

 

한국군이 정보부대를 재건한 것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할 때인 1950년 10월 21일로, 이날 국군방첩사령부의 전신인 육군 방첩대가 창설됐다. 1951년 1·4후퇴로 다시 밀리면서 일단의 한국군 패잔병이 황해도 구월산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구월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령도에 포진한 미군(당시는 KLO부대가 주둔)의 지원을 받으며 유격전을 펼쳤다. 

 

구월산 유격대로 불린 이들은 1953년 정전을 앞두고 백령도로 철수했는데 미군은 이들을 모아 ‘동키(donkey·당나귀) 부대’를 창설했다. 인천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동키 부대는 곧 북한에 들어가는 첩보부대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50년대까지만 해도 이북에는 한국에서 투입한 고정간첩이 있었고 해상과 육상으로 침투해 첩보수집 및 타격 임무를 수행했다. 

 

■ 1.21사태 계기로 선갑도, 장봉도, 684, 마니산 까치 등 4개 부대 창설

 

1968년 1.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군부대)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는데, 청와대로부터 300m 떨어져 있는 종로구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사건이다. 침투한 31명 중 사살 29명, 미확인 1명, 투항 1명(김신조 소위)의 전과를 올렸으며, 이때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비군과 5분대기조, 그리고 육군 3사관학교가 창설됐다. 을지 연습과 유격훈련이 이 사건을 계기로 생겨났고, 육군 방첩대가 국군보안사령부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편했다. 이 사건의 보복을 위해 창설된 4개 부대가 바로 선갑도부대(육군), 장봉도부대(해군), 684부대(공군, 실미도) 마니산 까치부대(해병대)였다.

 

첩보조직들도 김신조 일당의 침투 이후 이에 대응하고자 보강했다. 이때부터 특수공작부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전략목표·전술목표·훈련계획 등을 정하고 조직도 개편했는데, 설악개발단 창설기획자인 이춘국 예비역 대령에 따르면 선갑도부대가 803대로 변경됐고, HID 기능을 이어받은 설악개발단이 909대로 확대 편성됐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 간 첩보 전쟁이 일시 중단 됐다가 재개됐다. 이 시기 첩보전에 참여한 남북의 공작원들은 상상을 불허하는 힘과 기지로 난관을 돌파했다. 북한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기 위해 많은 공작원의 희생이 있었다. 이들은 비밀스러운 공작의 세계만큼이나 그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00년 하반기부터 북파공작원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서 말로만 듣던 북파공작원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HID 요원,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란 가치 믿기에 목숨 걸고 임무 수행

 

얼마 전 MBC PD 수첩에서 ‘전직 HID 요원의 인터뷰’가 화제가 되었다. HID가 어떤 부대이며 계엄 동원 및 임무 지시에 대한 수행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자기 군번도 모르고 그냥 훈련만 받다가 나중에 기간이 끝나면 (급여)통장 받고서 집에 가는 시스템 입니다. 계엄 동원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거기(HID) 인원들은 사회와 아예 단절된 삶을 사는 사람들 이잖아요, 뉴스나 신문을 볼 수도 없습니다.”  

 

만약 국내 정치인 사살 명령이 있었다면 실행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그냥 저 사람 죽이라면 안 죽이겠죠. 그런데 ‘저 사람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어떤 간첩 활동을 하고 있어’라고 잘 포장을 해놨으면 죽였을 수도 있겠죠. 북파공작원들은 그런 거에 조금의 머뭇거림이 없거든요”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잘못된 선택(명령)을 내린 분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HID 부대원들의 역사와 훈련과정을 보면 참으로 혹독하고 견디기 힘든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내가 죽더라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가치와 명예를 믿기 때문이다. ‘강철부대3’에서 압도적인 기량과 팀워크를 선보이며 우승한 HID 출신 강민호 팀장은 ‘진짜 영광은 현역 분들께’라며 겸손과 성원해준 국민께 감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HID는 존재 그 자체로도 북한의 도발에 대한 억지 전력으로서 의미가 있는 부대이다. 국가의 고급자산인 HID가 12.3 내란 사태로 반란과 테러에 동원되는 부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HID가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가치 있고 명예로운 일에 쓰일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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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안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예비역 육군 준장), 前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 前 777사령관 직무대리, 前 육군본부 정보처장, 前 국군정보사 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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