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일 기자 입력 : 2025.01.21 08:27 ㅣ 수정 : 2025.01.21 08:28
사업 계획에 트럼프 2기 시나리오 반영 ‘예측 불확실’ 환율 수준에 경계감 커져 자본비율 방어해야 밸류업도 추진 가능 금리인하 늦어지면 건전성 악화 우려도
[뉴스투데이=유한일 기자] 은행권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닥쳐올 금융시장 변동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당장 12·3 비상계엄 사태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까지 겹치면서 대내외 불확실성이 확대될 것이란 관측이다. 가장 우려되는 건 경영·영업 전략과 직결된 환율, 금리 상승 가능성이 지목된다. 주요 은행들은 리스크 예측성 강화와 사업 계획 수정 등을 통해 불확실성에 대한 ‘방파제 쌓기’에 분주하다.
21일 은행권에 따르면 국내 주요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연말 수립한 ‘2025년 사업 계획’에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추진할 주요 정책과 이에 따라 예상되는 금융시장 시나리오를 반영한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을 확정지은 건 지난해 11월 6일이었던 만큼 대통령 선거(대선) 기간 제시된 주요 공약을 기반으로 전망한 환율·금리 수준, 대출 성장, 리스크 관리 등이 종합적으로 적용됐다.
다만 이 같은 사업 계획이 원안대로 추진될 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가 촉발한 정치적 불확실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상하기 어려운 데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추진 속도 및 범위에 따라 변수가 속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사업·경영 방향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대내외 불확실성이 잔존해 있는 만큼 금융시장 변동성 모니터링 이후 전략을 수정할 가능성도 열려있다.
은행권이 가장 경계감을 보이고 있는 건 가파른 환율 상승세다. 전일 기준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대비 6.6원 내린 1451.7원에 거래를 마쳤다. 한국시간 이날 새벽 2시 진행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1450원대의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1300원대 중후반 수준을 형성하던 원·달러 환율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과 12·3 비상계엄 사태를 거치면서 우상향 중이다.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외화 자산의 위험가중금액(RWA)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RWA를 분모로 쓰는 보통주자본(CET1) 비율 하락으로 직결된다. 건전성 지표 악화로 은행들이 가계·기업에 대한 대출 문턱을 높일 경우 시중 유동성 공급 뿐 아니라 대출 자산 성장에도 제동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다.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르면 금융지주 CET1 비율은 0.01~0.02%포인트(p)가량 하락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CET1 비율은 은행을 자회사로 둔 금융지주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에도 영향을 끼친다. 주요 금융지주들은 밸류업 계획 중 하나로 CET1 비율 13% 초과 자본을 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 등 주주환원에 쓰겠다고 제시한 상태다. 다만 CET1 비율 방어에 실패하면 주주환원 여력이 줄어들고, 투자자들의 투자 심리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나은행은 하나금융연구소 보고서를 통해 “최근 환율이 급등하면서 밸류업 프로그램의 일환인 주주가치 환원과 환율의 연관성이 매우 높아졌다”며 “원·달러 환율이 안정될 때까지 금융사들은 자산 포트폴리오 조정을 통한 RWA 감축 노력을 병행하면서 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추구해야 한다”고 제언한 바 있다.
일단 은행권은 올해 예상되는 원·달러 환율 밴드(범위)를 넓게 잡고 구간별 리스크 관리 전략을 마련해 놓은 상황이다. 한 시중은행의 관계자는 “당분간 변동성 확대 불가피 등의 사유로 원·달러 환율은 1350~1500원, 평균 1420원 수준을 생각하며 분석 중”이라며 “물론 대내외 악재의 향방에 따라 1500원 돌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오버슈팅(일시적 급등)일 가능성도 동시에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으로 주요국 통화정책 경로가 수정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주요국 대상 관세 상향과 세금 인하 등의 정책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부추기고, 주요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인하를 늦출 것이란 관측이다. 실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긴축 완화 속도 조절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힘을 받고 있다. 이 경우 한국은행의 추가 기준금리 인하에도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시장금리는 은행의 수익성 뿐 아니라 건전성에도 영향을 끼친다. 특히 장기간 이어진 고금리 기조로 가계·기업 차주들의 상환 능력이 약화된 상황인데, 여기에 미국발(發) 금리 상승 우려가 덮친 셈이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고정이하여신(NPL) 잔액은 5조5821억원으로 전년동기(4조3419억원) 대비 28.6% 늘었다. NPL은 3개월 이상 연체돼 사실상 회수가 어려워진 부실채권이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자체만으로 국제 금융시장이 바로 반응하기 보다는 앞으로 경제와 관련해 내놓을 발언이나 정책 하나하나의 파급효과에 따라 단기 변동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원·달러 환율이나 채권금리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면서 유연한 대응 체계를 만들어 놓는 게 중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