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하늘이다...K-Food가 지켜야 할 정체성
음식은 지리적 숙명...쌀 문화권에 위치한 한국은 밥을 주식으로 삼아
한국, 분점성이 강한 자포니카 품종 선택한 탓에 젓가락 문화 발달
한국, 쌀밥을 중심으로 반찬이 배열되는 '공간 배열형'의 전형적 밥상
풍족한 나라였던 조선, 이앙법 개혁 금지하면서 가난한 나라로 전락?
조선 후기, 양반들은 하얀 쌀밥을 먹었지만 백성들은 찢어지게 가난해
세 끼 밥을 먹기 어려웠던 한국인, '대식'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 형성
배고픔에서 동학 혁명은 시작되고 밥은 하늘이라는 사상이 뿌리 내려
음식은 소프트파워=맥도날드와 코카콜라는 평화의 상징으로 확산돼
비빔밥과 김밥의 글로벌 경쟁력, 한식의 글로벌화라고 평가하기에 부족
국회 정무위원장을 지낸 3선 국회의원 출신 민병두 보험연수원장이 한국인에 대한 예리하고도 심층적인 분석을 담은 '민병두의 K-Sapience'를 연재합니다. 문화일보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으로 필력을 떨쳤던 언론인이기도 한 민 원장은 K컬처와 K푸드로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한국인을 'K-Sapience'라고 규정하고 그 내밀한 세계를 종횡무진 그려낼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지리는 지정학적 숙명이다'는 말이 있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미국이라는 지정학적 숙명을 만났다. 초강대국 미국을 넘어서는 위상을 생각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음식도 지리적 숙명이다. 쌀과 밀과 옥수수, 기후지리적으로 어느 문화권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식습관과 문화('culture'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로 'cultura'인데 경작 또는 재배를 의미)를 결정한다. 우리는 기후지리적으로 쌀 문화권에 위치해 있으며, 따라서 밥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garett Mead)는 “음식 습관을 바꾸는 것은 종교를 바꾸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자기 나라를 떠나 타지에서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역사를 봐도 그 나라의 음식을 잊지 못한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규모의 디아스포라를 갖고 있는 한민족도 만주와 연변, 멕시코와 미국에서 한국쌀을 재배하고 배추를 심어 김치를 담궈 먹었다. 음식은 그 나라의 DNA다. 우리에게 쌀은 조상이면서 생명이었다.
1. 음식을 먹는 도구 / 젓가락 문화권 , 포크 문화권, 손가락 문화권
인류는 역사의 대부분의 시기에 손으로 식사를 했다. 손으로 요리하고 손으로 먹었다. 어느 시기부터 도구를 이용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포크, 젓가락, 그리고 여전히 손을 쓰는 문화권으로 세계를 나눌 수 있다. (린 화이트 Lynn White) 서양인들은 중세시대까지는 대체로 수식(手食) 문화였다. 베네치아를 통해 로마시대의 포크가 다시 유행하고 르네상스를 맞아 식사 에티켓이 만들어지면서 포크 문화권이 형성됐다. 이탈리아에서 포크가 도구로서 효능감을 가지게 된 데에는 파스타의 발명이 작용했다. 그 전에는 손으로 빵을 뜯어먹고(지금도 그 전통이 남아 있다) 고기도 나이프로 잘라 손으로 집어 먹었다.
서양의 문학 작품에는 포크를 “이태리 놈들이나 쓰는 것”이라고 폄훼하는 표현이 나타난다. 여자 같다는 놀림도 있었다. 일부 교회학자들은 하느님이 주신 손은 본질적으로 깨끗하기 때문에 포크를 써서 식사를 하는 것은 신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봤다. 성경에 예수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들어 축복하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식후에 손 씻는 물이 담긴 그릇(finger bowl)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은 수식문화의 전통이다(《젓가락》ㅡ 동아시아 5,000년 음식문화를 집어 올린 도구 / Q 에드워드 왕 지음 / 따비 출판사). 그 편리성 때문에 점차 다른 유럽 국가로 보급되었고 18세기가 되어서 포크 옹호론이 대세가 되면서 하층으로 문명화 과정을 밟았다. 포크의 대중화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파스타의 인기가 작용했고 육식 문화의 특성상 칼과 포크를 함께 쓰는 것이 편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중국, 일본 동양3국은 젓가락 문화권이다. 쌀을 주식으로 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젓가락을 사용했다. 그 이전에는 기장이 주식이었고 죽으로 요리했다. 숟가락과 손을 사용했다. 7세기 들어서 젓가락이 보급되었는데 부차적인 위치에서 점차 숟가락과 대등해졌다. 중국에서는 국수와 만두가 보급되면서, 일본에서는 생선을 발라먹는데 이점이 있어서 점차 젓가락이 주요한 위치로 자리잡았다. 한국에서는 국과 찌개 문화가 있어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함께 사용했다. 동아시아 3개국에서 젓가락이 주요한 수단으로 등장한 데에는 주식인 쌀의 영향이 컸다.
쌀은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안남미라고 알려져 있는 인디카종은 전세계 쌀 생산량의 80%가 넘는다. 인디카종은 벼의 키가 작고 쌀알이 길고(long grain, 장립종) 점성이 약해 쌀이 풀풀 날린다.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볶음밥을 할 때 많이 사용한다. 한국, 중국, 타이완, 일본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 품종은 벼의 키가 작고, 쌀알은 굵고 둥글고(short grain, 단립종) 점성이 강하다. 한국과 일본의 양식인 비빔밥, 스시를 만들기에 좋다. 중국에서는 두 가지 종자를 다 키웠다.
분점성이 강한 자포니카 품종은 밥이 찰지고 뭉쳐져서 젓가락으로 먹기에 좋다. 밥과 반찬을 함께 먹는데 잘 어울린다. 우리 조상들이 우성인 인디카종을 재배했다면 젓가락을 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점성이 강한 자포니카종을 먹으면서 한국의 식문화도 다르게 정립된다. 열성을 택한 이유는 자포니카 밥이 주는 포만감 때문이다.
2. 공간 배열형과 시간 배열형
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이시게 나오미치가 세계의 밥상, 식단을 분류했다. 서양식은 시계열형, 시간 배열형이다. 수프 샐러드에서 메인 요리 그리고 디저트로 이어진다. 한꺼번에 내놓은 한상 차림형이 아니라 코스형이다. 또 식탁에 함께 앉지만 개인마다 식사가 제공된다. 개인 전용형이다. 한국 사람들이 양식을 주문할 때 흔히 하는 나눠서 먹는(share) 공통 문화가 들어설 틈이 없다.
한국과 일본은 공간 전개형, 공간 배열형이다. 즉 한꺼번에 밥상에 모든 먹거리를 올려놓는다. 한국에서 밥과 국은 개인별로 제공되지만 반찬이나 요리는 공통으로 제공된다. 중국도 원탁에 요리를 공동 음식으로 차려 놓는 공통 문화가 내려왔다. 원래는 완전 공간배열형이었지만 국수가 위상이 높아지면서 시공간배열이 결합되었다. 일본은 반찬이 개별형이다.
“중국어로 ‘판(飯)’은 모든 곡물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다. 오늘날 쌀밥을 의미한다. 한국어로는 ‘밥’, 일본어로는 '고항(밥)', 베트남어로는 ‘꼼(com)’이다. 같은 의미다. 중국에서 밥을 먹는 것을 ‘츠판(吃飯)’이라고 하는데 익힌 곡물(쌀밥)을 먹는 것을 말한다. 물론, 식사할 때 '차이(菜)’ 라고 통칭되는 곡물 음식이 아닌 요리들도 함께 차려지지만 그때도 중국인은 그냥 밥을 먹는다고 말한다. 일본어로 '고항오타베루(ご飯を食べる)'에는 단순히 쌀밥을 먹는다는 의미를 넘어 다른 반찬이나 요리와 함께 한끼 식사를 한다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실제로 곡물 음식이 아닌 음식들은 밥맛을 돋워 곡물 음식을 삼키기 쉽게 하는 것이다”(《젓가락》 Q. 에드워드 왕)
동양 3개국이 밥을 기본으로 하여 반찬과 요리를 배열했지만, 밥이 차지하는 위상은 다르다. 중국은 요리의 천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식자원이 풍부해지면서 곡물 즉 쌀밥의 위상이 퇴조했다. 밥과 요리가 병렬적이 된 것이다. 국수로 대체되기도 하고 요리의 하나로서 볶음밥이 나오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쌀밥을 별도로 먹기도 하지만 스시, 마키, 카레 등의 조리 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밥이 주식이 되기도 하고 부식이 되기도 하는 등 경계가 모호하다.
우리나라처럼 완벽하게 쌀밥을 중심으로 반찬이 배열되는 나라는 없다. 공간 배열형의 전형이다. 한국에서 밥은 주식이고 반찬은 부식이다. 따듯한 쌀밥에 뜨거운 국이 병렬적이다. 반찬은 보조적이다. 한식의 근본은 쌀이다. 밥이 없는데 김치, 나물, 된장찌개만을 요리로 먹을 수는 없다. 밥맛을 돋구기 위해 발효 식품을 포함하여 셀 수 없이 많은 반찬의 종이 개발되었다. 밥을 못 먹을 때 개발되었던 구황 음식도 반찬으로 밥상에 동원되었다. 밥이 없으면 한식이 없는 것이다.
3. 인류 문명을 가른 쌀, 밀, 옥수수
인류의 문화를 쌀로 밥을 짓는 문화, 밀로 빵을 만드는 문화, 감자와 옥수수를 먹는 문화로 나눌 수 있다. 햇빛의 양이 다르고, 태양 에너지의 편파가 강수량 차이를 만들었다. 여기서 기후지리학적 숙명이 싹을 티웠다. 《음식경제사》(음식이 만든 인류의 역사 / 인물과 사상사)를 지은 권은중은 이 차이가 문명과 발전을 규정지었다고 분석한다. 쌀을 주식으로 한 인도와 중국은 몬순 기후 덕분에 발전에서 앞섰다. 대항해 시대 이전만 해도 세계사는 ‘가난한 유럽’과 ‘부유한 동양’의 대비였다. 신대륙 발견 이전에 미주 대륙은 세계사 밖에 있었다.
중국의 발전은 눈부셨다. 철기 문명이 시작된 뒤 16세기 초까지 서양의 생산력을 압도했다. 중국 남부의 쌀 생산량은 중국을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를 넘어 세계의 패권 국가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쌀의 단위 면적당 생산력은 다른 어떤 곡식보다도 월등하다. 벼를 물 속에서 키우면 잡초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농부들은 이앙법을 개발했다.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앙법은 풀을 뽑는데 들어가는 노동력의 80%를 절감해 수확을 두 배로 늘려줬다. 이앙법은 당나라 때 고안되어 송나라 때 정착되었다.
곡식 농사는 채집이나 수렵과 달리 강제 혹은 착취가 동원된다. 관개 사업이 필수다. 중국의 대운하는 서양보다 천년 전에 건설되었다. 여기에는 강제적인 노동력 동원이 불가피하고 절대 권력이 있어야 한다. 절대 권력의 등장으로 중국의 역동성이 떨어졌다. 북방 민족에게 정권을 빼앗긴 일 이외에는 사회의 변화가 크지 않았다. 부유해진 중국은 잉여 생산물에 만족했다. 제조업과 무역의 발전을 등한시했다.
동양의 곡창 지대에 견주어 한참 북쪽에 있는 유럽은 편서풍의 영향으로 연중 비가 내라는 서안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이런 기후에서는 풀이 잘 자라므로 유럽은 목축으로 곡식 부족을 충당했다. 밀은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쌀에 비해 낮다. 따라서 유럽은 강력한 왕권 국가를 만들기 어려웠으며 대항해 시대에 신대륙을 발견한 뒤 약탈과 학살로 이룬 자본 축적을 통해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국가 개념이 생겨났다.
유럽은 식량 자원이 가난해서 귀족들이 권력을 평민들과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로 고대에는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를 모두 실행하게 됐다.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려면 적은 생산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고 불안한 한 명보다 여러 명의 지혜에 의존해야 했다.
로마 제국 이후에는 유럽을 지배하는 대국이 없었다. 크고 작은 도시 국가들의 경쟁이 있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바다 건너로 눈을 돌렸다. 신대륙에는 씨를 뿌리기만 해도 잘 자라나는 감자와 옥수수가 있었다. 새로운 식량의 유입은 페스트로 급감했던 유럽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게 된 동기가 됐다.
유럽의 역동성은 아시아를 집어삼켰다. 쌀의 역사가 밀의 역사에 영광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렇다면 몬순 기후권도 아니면서 쌀 문화권인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지금껏 설명한 관점에서 음식의 경제사를 바라 본 권은중은 “중국 쌀의 역사는 한때 놀아본 아버지의 몰락 과정이라면, 우리나라는 가난한 집에서 아이들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어머니의 슬픈 역사에 가깝다”고 했다.
4. 조선은 가난한 나라 아니면 풍족한 나라? - 이앙법과 개혁의 거부가 화근
조선 초중기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선조 임금의 발언이 있다. 그는 조선의 국력이 고려 때만큼 못하다고 한탄을 하면서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중국)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고 한탄했다. 임진왜란으로 백성을 버리고 피난갔던 임금의 넋두리일 수도 있지만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 지대인 환경은 농사짓기에 악조건이다.
캐나다 선교사 게일(Gale)이 쓴 《코리안 스케치》에는 “내륙에 들어섰을 때 기름진 언덕과 계곡에 오곡이 풍성하게 무르익고 있는 모습에 매혹되었으며, 경작할 수 있는 모든 땅이 개간되어 있는 상태이며, 양식은 수백만의 한국인이 먹고 살기에 충분하며...”(정혜경《밥의 인문학》에서 재인용)라는 관찰기가 나온다. 선조 때에 비하면 3백 년이 지난 시기이다. 선조의 기록과 달리 부족함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왕조의 흥망성쇠는 농업에 달려 있었다. 가뭄이 들면 백성이 굶고, 게다가 역병이 들면 민심이 흉흉해지고 민란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가뭄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으려면 저수지와 보 등 관개 시설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서 이앙법을 도입했다가 가뭄이 들면 모내기를 할 수 없어서 그해 농사는 망한다. 대체 식량도 없고 식량을 수입할 수도 없어서 초근목피와 구황작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임금은 기우제라도 지내서 성난 민심을 달래야 한다. 조선은 여기서 관개 시설 구축과 이앙법을 도입하는 과감한 개혁의 길로 가지 않고 이앙법을 금지했다. 조선이 건국된 지 6년째 되는 해인 1397년에 법률서인 경제육전에서 모내기를 하지 못하게 대못을 박았다.
잇달은 외적들의 침입으로 농민들의 삶은 피폐했다. 국가는 금지했지만 농민들은 살 길을 택했다. 농민들이 작은 규모의 보를 쌓고 저수지를 만들었다. 18세기 말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가 8천여 개에 달했다. 결국 중국에 비해 700년이나 늦은 영조 시대에 와서 합법화되었다. 조선은 잇달아 개혁의 시기를 놓쳤다. 조선 초에는 자작농이 60~70%에 달했는데 후반기로 가서는 소작농이 60~70%로 늘어났다. 양민들의 삶이 피폐해졌다. 자원이 없어서 가난한 것도 있지만 정치의 실패로 백성이 더욱 가난해졌다. 토지 제도의 문란과 조세 제도를 통한 왜곡, 양곡의 저장 관리 배급 등 제도의 문제에서 오는 가난이 적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5.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후반기로 들어와서는 기근과 민란이 잦았다. 조선왕조 마지막 백년은 홍경래의 난으로 시작해서 동학농민전쟁으로 발전했다. 가히 민란의 시대다. “조선 지배층이 성리학을 체제 강화에 활용했다면, 반란 세력들은 명리학을 가지고 왕권을 흔들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놈이라도 제왕의 사주팔자를 타고나면 제왕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타고난 신분보다 타고난 팔자가 더 중요했다. 명리학에는 계급을 부정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한국학의 즐거움》중 조용헌 '한국의 역학' / Humanist). 민란에는 조선왕조가 망하고 무슨 무슨 성을 가진 이가 나타나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설들이 따라다녔다.
양반들은 하얀 쌀밥을 먹었지만 백성들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난한 집에서는 음력 4~5월 무렵이면 가을에 추수를 해서 쌓아 놓았던 곡식이 거의 바닥나곤 했다. 보릿고개가 되면 가난한 사람들은 솔잎이나 소나무 껍질 따위를 먹고 살았다. 초근목피를 먹으면 일을 볼 때 항문이 찢어져 피가 나올 때가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토지 조사 사업으로 쌀을 수탈했다. 1934년에는 56.4%를 이출해 갔다. 절반이 넘는 쌀을 일본 군대의 밥 짓는데 사용했다. 산미 증식 계획으로 1,500여 재래 품종이 대부분 사라지고 1938년에는 겨우 17.8%인 55종만이 남았다. 해방 이후 20년간의 시기는 일제 강점의 후유증과 한국전쟁, 잇달은 벼농사 흉작으로 역사상 가장 빈곤한 시기를 경험했다. 그 빈곤을 메꾸기 위해서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이 한국에 대량 유입되었다.
소설과 시에서는 보릿고개를 주요한 소재로 다뤘다. 황금찬은 보릿고개라는 시에서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 몽블랑은 유럽 / 와스카라는 아메리카의 것 /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ㅡ 굶으며 넘었다 /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넘었다 / 코리아의 보릿고개 /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미터'
가수 진성이 부른 <보릿고개>(2015)는 우리의 가난했던 과거를 회상케 한다. 얼마나 배고팠던 시절의 기억이 슬펐던지 21세기에 이 노래를 만들었다.
'아야 우지마라 배 꺼질라 /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 초근목피의 그 시절 /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 한 많은 보릿고개여 /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 어머님의 통곡이었소'.
6. 한국인은 밥을 많이 먹었다, 밥심으로 일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었다고 하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물자가 풍족하지 않은데 우리 조상들은 왜 많이 먹었을까? 항상 많이 먹었을까? 아니면 어쩌다 먹을 것이 생기면 많이 먹었을까.
역사적 근거에 따르면, 현재 쓰는 일반적인 밥그릇의 크기는 350g이 들어갈 정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690g, 고려 시대에는 1,040g, 고구려 시대에는 무려 1,300g의 밥그릇이 발굴되었다.(토지 주택 박물관 사진 참조)
송나라 사신인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인들은 먹는 것만 좋아하는 듯 자꾸 권했다”고 기술했다. 임진왜란 당시 작성한 《쇄미록 瑣尾錄》에서는 전쟁 시기인데도 한끼에 7홉(420g /오늘의 한국인 평균은 140g)의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에 힘쓰는 건 으뜸이다. 유구국(오키나와)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며 비웃었다"라고 기록했다. 이덕무(1741~1793), 이규경(1788~1856)의 기록에 따르면 장대한 남자는 한끼에 7홉(오늘날 성인 남자의 세 배)으로, 보통 남자와 큰 여자는 5홉, 아이는 3홉의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
조선 전기에 이극돈은 풍년이면 먹을 것을 아끼지 않아 중국인들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번에 먹는다고 개탄했다. 잘 헤아리지 않고 먹을 것이 생기면 닥치는 대로 먹는다 하여 조포석기(朝飽夕飢)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아침에 양식을 다 먹어치워 저녁에는 굶는다는 의미다.
한말에 대륙을 여행했던 영국의 여류 탐험가 이사벨라 비숍은 “하루 4파운드의 쌀을 먹어도 매일 잘 삭이는 한국인의 배는 용광로다”라고 기록했다. 《조선교회사》를 출간한 가톨릭 신부 달레(Claude Charles Dallet)는 조선 사람들의 대식과 식탐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인들은 보통 일본인들의 2배를 먹는다”(선교사 그리피스 존)는 비교도 있다.
성 다블뤼 안(安) 안토니오 주교의 기록에서도 대식을 하는 조선인들의 식습관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식에 대해서는 대신과 평민의 구별이 없다. 조선 사람들은 많이 먹는 것이 곧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며, 식사의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 사람들은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법이 없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신자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 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에서 65세가 된 어느 노인은 식욕이 없다 하면서도 다섯 사발을 비웠다. 조선 사람들은 열 사발을 감당하는 자를 장사라고 부른다.”
7. 왜 많이 먹었을까?
외국인들의 관찰기를 계속 인용하면 민망할 정도이다. 식충이라고 할 정도로 많이 먹었다. 복숭아와 참외를 적게는 10개, 많으면 20~30개를 앉은 자리에서 먹어치웠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안토니오 주교는 “조선인들의 집에는 비축 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 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고 그 이유를 분석했다. 이규태는 ‘한국인의 음식문화’에서 반찬이 부족했기에 밥만 먹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외국인들의 관찰기에는 김치, 깻잎, 쇠고기, 개고기, 곱창, 물고기들이 함께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다.
정혜경은 《밥의 인문학》에서 아침, 저녁으로 하루 두 끼를 먹은 것을 원인으로 들었다. 점심은 말 그대로 마음에 점을 찍는 정도로 먹었고, 그나마 9월에서 정월까지는 점심을 걸렀다. 언제나 세 끼 밥을 먹기 어려워서 있을 때 ‘배 부르게 먹는 것’으로 식사 습관이 고착되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면 새참을 먹을 때 밥 그릇의 크기가 아주 커서 점심이 그냥 마음에 점을 찍는 정도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한국학의 즐거움》에서 주영하의 '한국의 음식'편을 보면 조선 시대가 절대 빈곤의 시대로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아서 밥 먹을 것이 생기면 폭식, 대식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대식의 쌀밥을 위해서 나라에서도 곡물 생산에만 집중하고 그 결과 다른 먹을거리를 생산하지 않는 악순환이 생겼다고 본다. 일상적 빈곤 때문에 먹을 것이 생기면 잔뜩 먹는 식문화가 만들어지면서 일상적 빈곤에 시달리게 됐다(《의식주 살아 있는 조선의 풍경》한국고문서학회)는 분석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 사람은 혀로 먹고(맛으로 먹고), 일본 사람은 눈으로 먹고, 한국 사람은 배로 먹는다”(《일상으로 본 조선 시대 이야기》정연식)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만큼 한국사람은 밥을 많이 먹어야 식사를 했다고 생각했다. 밥이 보약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맛있게 먹어라”고 하지 않고 “많이 먹어라”는 인사말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대식은 힘들게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비극적인 자화상이었다.
8. 밥이 하늘이다.
배고픔에서 동학 혁명이 시작되었다. 농민이 농사지어서 소출한 쌀은 양반의 것이었다. 전체 백성의 80%가 되는 농민은 평생 따듯한 흰쌀밥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250여 개가 되는 쌀과 관련된 속담의 상당수는 이들의 한에서 나온 것이다. 쌀밥은 양반의 계급장이고 굶주림은 농민의 표찰이었다. 농민은 흰쌀밥 대신에 보리, 기장, 수수로 밥을 지어먹었거나 굶었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 평등 사상은 500년 동안 유지된 조선의 주자학 중심의 군신 · 반상 체제에 파열을 내기 시작했다. '사람 대하기를 하늘 대하듯 하라'(事人如天)고 가르치고 실천했다. 천대받으며 인간 이하 대접을 받던 여성을 '하늘님'이라고 높여주었다. 어린아이를 때리지 말라면서 어린아이가 상하면 하늘이 상한다며 어린이 사랑을 역설했다.
나아가서 만물의 주인은 인간만이 아니며, 주변 모든 것에는 다 하늘이 담겨 있으니 어느 것 하나 소중치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땅을 소중히 여겨라', '땅에도 하늘이 담겨 있고 우리가 먹는 밥 한 그릇에는 모든 생명이 담겨 있다'고 했다. 배고픈 민중에게 밥은 하늘 그 자체였으며, 하늘 만큼 중요했다. 하늘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 의지하니 만사를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다. 밥은 하늘의 가르침이다. 밥 한 그릇을 먹으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닫는 만사지(萬事知)를 얻을 수 있다. 하늘은 누구의 것이 아니다. 밥도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아니다. 밥은 하늘이고 만인의 것이다.
훗날 저항 시인 김지하도 ‘밥은 하늘입니다’라는 시에서 밥이 안으로 들어갈 때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이라고 했다. '밥은 하늘입니다 /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 밥이 하늘입니다 //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 밥이 하늘입니다 //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 밥이 하늘입니다 // 아아 밥은 /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먹는 것을 최고의 은혜로 생각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가 공통으로 갖고 있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 음식으로 주림을 달래고 몸과 마음을 바로 하여 사회 대중을 위하여 봉사하겠습니다” 불교의 공양게송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직접 기도문을 만들어 군중들에게 알려주었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도 골고루 일용할 양식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쌀이 하늘이다'는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쌀과 식량 자원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해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히고 결국 패망한 조선에서 민중이 남긴 교훈이다. 지금은 농업 국가가 아니지만 산업화 시대, 정보화 시대에도 여전히 분배에 실패하면 국가가 쇠퇴하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밥그릇 싸움’이 모든 싸움의 본질이다. 밥을 하늘로 생각하면 누구의 독차지가 되지 않는다. 생명의 알맹이에 얽힌 조상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밥은 우주이며 하늘이고 모든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9. 음식은 소프트파워
음식은 최고, 최상의 소프트 파워다. 음식처럼 국경을 넘어 세계화되는 것은 많지 않다. 군사력과 같은 하드 파워 없이도 세계화가 가능한 것이 음식이다. 인도네시아 볶음밥인 나시고랭, 베트남 쌀국수는 국력의 뒷받침이 없어도 세계화가 됐다. 중국 요리는 1848년 노동 이민을 통해서 미국에 상륙하여 20세기 초부터 세계화가 되었다. 중국이 역사상 가장 힘든 때였다. 지금은 미국에만 중식당이 4만여 개로 맥도널드 KFC를 다 합친 것보다 많다. B급 음식 취급을 받던 나폴리의 피자도 미국을 통해서 세계인의 음식이 되었다. ‘배달’이라는 무기가 탑재되면서 피자에 날개가 달렸다.
냉전 시대에 맥도날드와 코카콜라는 평화와 세계화의 상징이었다. 토머스 프리드만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책을 통해서 맥도날드 평화 이론을 주장했다. 맥도날드가 진출한 곳에서는 전쟁이 없다며 1990년 1월 모스크바 맥도날드 1호점 개설에 의미를 부여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의 정세 불안은 러시아와 해당 지역에서 미국 프랜차이즈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패스트푸드는 여전히 미국의 강한 소프트 파워다.
1960년대 일본의 부상과 함께 세계화된 것이 스시다. 고양이 사료로 쓰던 참치가 고급 식재료가 되었다. 일본의 비즈니스맨들이 세계 도처를 휘젓자 스시도 세계로 퍼져나갔다. 스시의 세계화다. 미국에서 스시 바를 열겠다고 나선 이들이 1만여 명에 달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나 같으면 핫도그를 먹겠다”고 스시를 얕잡아보는 칼럼이 실렸는데 아마 지금은 맛집 순례에 스시 바를 순위 안에 넣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쌀이 좋다, 밥맛이 좋다는 평가가 많다. 일본은 밥맛을 좋게 하기 위해서 전략적인 투자를 했다. 이노우에 히사시라는 일본 작가는 쌀 개방에 반대하면서 “쌀이 일본의 정신이고 심장”이라고 하여 고유 품종에 대한 애착을 보여줬다. 일본인들은 질소 비료를 많이 쓰면 생산량이 늘어나는데도 비료를 적게 썼다. 비료를 많이 쓰지 않으면 단백질 함량이 줄어들고 밥맛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정미된 쌀을 미곡 종합 처리장에서 74% 단일미로 분류하여 시장에 내놓는다. 반면 우리나라는 단일미가 38%에 불과하다.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여러 쌀을 섞어서 팔다 보니 품종별로 고유의 맛이 나지 않는다.
10. 다시 ‘밥’을 살려야 민족이 산다
서울대학교 농대 교수로 재직하던 허문회 교수는 식량 부족의 해결은 농업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생산성이 높은 벼 개발을 계획했다. 필리핀, 대만, 일본의 삼원 교배를 통해 통일(IR667) 품종을 1971년 개발했다. 1972년부터 통일벼가 농가에 보급되어 1976년 자급자족의 꿈을 이루었다. 1977년 마침내 연간 4천만 석의 쌀이 생산되어 쌀이 남아돌자 정부의 정책이 바뀌었다. 쌀을 강제로 소비하지 못하게 하던 정책에서 쌀 소비를 늘리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쌀이 모자랄 때는 무미일(無米日)을 정해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했다. 1969년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 일명 '무미일'로 정해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1977년이 되어서야 분식날을 폐지했다. 14년만에 쌀막걸리를 제조를 허용했다는데 그 해 10대 뉴스에 선정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의 잉여 농산물 제공과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펼친 식단의 서구화 정책으로 국민의 식생활이 크게 바뀌었다. 1970년대부터 정부의 운동 차원으로 추진된 빵과 고기 중심의 식사 문화가 식단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양식당, 일식당이 고급 식당으로 등장하면서 한식과 차등화했다.
게다가 영양학을 동원한 쌀에 대한 공격에도 정부가 앞장섰다. 비만과 당뇨의 원인이라고 했다. 조선 시대에 초상화나 사진을 보면 밥을 그렇게 많이 먹었어도 비만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반찬과 골고루 먹고 농업 노동을 통해 칼로리를 소비했기 때문이다. 쌀은 완전 음식이다. 젓가락으로 조금씩 집어먹으면 천천히 먹기 때문에 소화도 잘된다(《젓가락 식사법》 키미코 바버). 국수와 빵은 조금씩 집어서 오래 씹어먹을 수 없다. 밥을 먹으면 밀가루 음식과 달리 혈당 수치가 급격하게 올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밀가루 음식보다 우수하다고 한다.
식단의 서구화로 이제 밥은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었다. 밥에 대한 편견과 밥상을 차리는 번거로움 때문에 밥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직장인들은 아침 밥을 거르고 빵이나 시리얼로 대체한다. 1970년대에 이대 후문에서 최초의 서구식 코스 형태로 개발된 한정식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지금 고급 음식점에서는 식사 끝무렵, 작은 공기에 서너 젓가락 정도의 밥을 제공하고 있다. 그나마도 먹지 않는 손님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1960년대에 비해서 1인당 쌀의 소비량은 반의 반도 안된다. 쌀은 남아 돌고 있다.
아직도 한국인의 의식에는 밥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밥은 먹고 사냐’ '밥값 했다', '밥줄 끊어졌다', ‘찬밥 신세’, '밥맛이다', ‘밥 빌어먹다’, ‘밥은 먹고 산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 ‘밥만 축낸다’ 등등. 한국인의 인사 역시 밥으로 시작해서 밥으로 끝난다. "언제 밥 한번 먹자", "진지 드셨습니까?”. 이처럼 밥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생활에서부터 우리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사람들 마음 속에서는 밥을 먹어야 식사를 했다는 생각이 남아 있다. 한정식을 먹을 때, 실컷 식사를 하고서는 마지막에 밥을 달라고 하지 않고 식사를 달라고 한다. 주인들도 “식사 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밥을 먹어야 식사를 한 것이라는 수천년의 의식이 남아 있다.
식문화는 그 나라의 정체성이다. 한국인들은 지금 아무도 한복을 입고 다니지 않는다. 돌잔치, 본인의 결혼식, 자녀의 결혼식, 팔순 잔치 일생에 네 번 정도 한복을 입는다. 세계화가 되면서 음식도 국경과 입맛을 자유롭게 넘나들지만 우리 음식을 잃어버리면 그에 따른 문화와 전통의 상당한 자산을 상실한다. 의복을 잃은데 이어서, 음식을 잃고 나면 언어를 잃을 것이다. 우리의 옷과 음식과 언어를 지켜야 한다. 밥을 지켜야 한다.
요즘 들어서 한식의 세계화를 논한다. 드라마 ‘대장금’ (2003)과 K-Pop의 영향으로 한국음식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발효 식품인 김치는 그 전부터 경쟁력이 있었으나 우리가 부식으로 먹는 김치가 서양에서 요리가 될 수는 없다. 주식과 부식의 개념이 없는, 즉 밥을 중심으로 반찬을 먹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들은 주부식을 합친 비빔밥이나 간편식인 라면, 김밥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 고유의 밥과 반찬으로 구성된 밥상과는 다른 한식이다. K-Food가 유행한다는데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인 ‘밥’을 잃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글의 상당 부분은 이규태 《한국인의 밥상 문화》, 정혜경의 《밥의 인문학》, 김경은의 《한중일 밥상 문화》, 권은중의 《음식 경제사》, Q. 애드워드 왕의 《젓가락》, 주영하의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이어령의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 너 누구니》 정혜경의 《문학이 차린 밥상》 등을 참고 했다. 혹여 일일이 주석을 달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한다.)